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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습재 권벽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2. 28. 10:00

    습재 권벽선생 묘

     

    묘지답사를 준비하다보면 내가 찾고자 하는 묘역은 안보이고 엉뚱한 묘역이 눈에 어른거려서 누구 묘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 궁금증을 풀려면 그곳을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번 고양시 묘지답사에서는 몇 곳의 민묘

    들이 나를 유혹하여 어쩔 수 없이 다녀왔는데 그 중에 한 곳이 권벽선생 묘이다..

    예정에 없던 답사라 얼른 둘러보고 나중에 확인하는 그런 절차를 거치며 사진만 대충 찍고 어느 분인가만 확인하고 돌아

    나오곤 한다. 고양군지에 보면 선현, 왕가, 후궁 묘를 합해 200분이 넘게 있다. 이걸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인것 같고

    그래도 유명하신 분들은 다 돌아봐야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차를 타고가다 묘역이 넓고 석물이 있으면 찾아가곤

    하는데 그러다보면 예정된 답사를 그르칠때가 있어서 왠만해서는 유혹을 뿌리치고 예정된 답사를 한다.

    권벽선생 묘역은 워낙 멋있어보여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들어갔는데 묘를 쉽게 찾아 시간은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자칫 묘를 못찾는 날에는 시간만 엄청 소비하고 마는데 이번에는 느낌으로 한번에 찾아서 다행이었다. 묘 뒷쪽에 군부

    대 시설이 있어서 다음지도에는 표시가 안되니 참고해서 보시길....

    권벽(權擘)
    1520년(중종 15)∼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아버지는 좌승지 권기(權祺)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목사 김세영(金世英)의 딸이다. 시인 권필(權韠)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발탁되었는데, 이때에 안명세(安名世)·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를 즐겼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 윤임(尹任) 등과 친하며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공박한 것으로 을사사화에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명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註官)이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문(吏文)에 밝아 행정실무에 능하였고, 서장관(書狀官)과 동지사로 두번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접사(遠接使)가 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성주목사·장단부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순무어사 허봉(許篈)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그뒤 대호군·오위장·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폈다.
    시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승문원부제조·제조(提調) 및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지내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명나라에 오가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1572년(선조 5) 김성일(金誠一) 등과 함께 완의록(完議錄)에 올랐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한시에 능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즐겼으며, 당대의 명사인 노수신(盧守愼)·정유길(鄭惟吉) 등도 그의 시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50여년간 벼슬을 하는 동안 가사를 돌보지 않고 자식의 혼사도 모두 부인에게 맡겨버렸으며, 손님도 거의 맞지 않으면서 오직 시에만 마음을 쏟아 높은 경지를 이룩하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습재집》 8권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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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정
       습재 권벽선생 묘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117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1174(사당 뒷쪽으로 돌아 우측에 솟은묘)
       안동권씨


     

     

     

     

     

     

     

     

     

      

    권벽(權擘) 묘(墓)
      벽제읍(碧蹄邑) 성석 3리(城石 3里)에  고봉산(高峯山)에서 서북방면  상감천(上甘川)마을에 위치해 있다.
      묘(墓)는 정부인(貞夫人) 해주정씨(海州鄭氏),  정부인(貞夫人) 경주정씨(慶州鄭氏)가 합부(合 )된 쌍분(雙墳)으로 묘(墓) 앞에는 서기1963년에 중건(重建)한 조그마한  표(表)가 있는데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행(行) 예조참의(禮曹參議) 익재권선생벽지묘(翌齋權先生擘之墓)」라 기록(記錄)되어있다. 상석(床石)1, 문인석(文人石)2, 망주석(望柱石)2기(基) 구비(具備)되어있고 묘하(墓下)  50m 지점(地點)에  폭 72cm,  두께 20cm,  높이 168cm의 대리석(大理石)  묘갈(墓碣)이 있는데  1606년 여름에   세운 것으로 전자(篆字)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 익재선생(翌齋先生) 권벽지묘(權擘之墓)」라 기록(記錄)하였고 규격(規格)은 폭 72cm, 두께 18cm, 높이  168cm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짓고 4대손(代孫) 변( )이 쓴 것으로 대명만역병오(大明萬曆丙午)(1606)세맹하지길(歲孟夏之吉) 사진사급제우춘방우유덕(賜進士及第右春坊右諭德)   사일품복정사주지번(賜一品服正使朱之蕃)이 제(題)한 것이다.
      권벽(權擘)은 조선시대  문신으로써 중종(中宗)  15년(1520)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26년(1593)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대수(大手) 호(號)는  습재(習齋)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승지(承旨) 기(祺)의 아들, 중종(中宗) 38년(1543)에 진사(進士)가 된 뒤,  바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사관(史官)에 기용되었다. 3년 뒤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오랫동안 봉상사정(奉常寺正)을 지냈다. 선조(宣祖) 1년(1568)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다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  1573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는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1년(宣祖 1578) 외직으로 나가있을 때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 허봉(許 )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선조(宣祖) 13년에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헌부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가 3년만에 가승지(假承旨)로 기용되고, 1585년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중종(中宗)·인종(仁宗)·명종(明宗) 3대(代)에 걸친 실록(實錄)을  편찬하였다. 저서(著書)로
    는 『습제집(習齋集)』이 있다.

    <고양군지에서 인용>

     

     

     

     

     

     

     

     

     

     

     

     

     

     

     

     

     

     

     

     

     

     

     

     

     

    ▼ 습재 권벽선생 사당... 

    ▼ 습재 권벽선생 묘비... 최근에 세운 묘비.. 형식은 다르지만 묘비이다..

    ▼ 습재 권벽선생 구 묘비

    ▼ 습재 권벽선생 묘... 사당 뒤로 돌아가면 좌, 우에 묘가 있는데 우측에 솟아있는 묘가 습재선생 묘.

    ▼ 습재 권벽선생 묘 좌, 우측 전경

     

    ▼ 습재 권벽선생 묘비

    ▼ 습재 권벽선생 묘 석물...

    ▼ 습재 권벽선생 묘 뒷쪽에 부대 시설이 있어서 지도에는 표시가 안된다..

    ▼ 습재 권벽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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