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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서희 장군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27. 10:00
서희장군 묘
여주의 북쪽 끝에 있다보니 여주 답사에서도 제외되고 별도 방문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하여 양평 방문에
맞춰 기회를 옅보던중 지난번 양평 답사 때 다녀온 곳이다. 해가 넘어가는 시각이라 서둘렀는데도 사진기를
작은것으로 준비했더니 화질이 좋지 못하다.
인근에 있는 해여림식물원과 함께하면 효율적인 답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희(徐熙)
942년(태조 25, 943?)∼998년(목종 1). 고려 초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1. 가계와 관직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조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에 이어서 서희 자신도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그의 아들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을 뿐더러,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아울러 그는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내의시랑(內議侍郞) 등을 거쳐, 983년(성종 2)에는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2. 거란과의 외교담판
이와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도 이에 못지않는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親宋外交)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한 뒤,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에서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와서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거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적극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이 동조하자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뜰에서의 배례(拜禮)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 곧 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하여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歸州)‧흥화진(興化鎭) 등에 강동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3. 성품과 처사
서희는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至尊)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며,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그의 면모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서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에 병으로 개국사(開國寺)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제36호 서희 장군 묘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53-1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 산53-1(안내판 따라가면 바로 나옴) 이천서씨 고려 초기의 외교가이며 문신인 장위공 서희(942∼998)의 묘소이다.
광종 11년(960)에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올랐으며, 정치적 활동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성종 12년(973)에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오자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후 청천강 이북에 있던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평안북도 일대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의 묘는 부인의 묘와 같이 있는 합장묘이고, 봉분 아래에 2단의 둘레석을 두른 형태이다. 쌍분의 가운데에 묘비가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씩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여주군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서희 장군 묘 안내판▼ 서희 장군 묘역 앞에 있는 신도비와 재실 상산제
▼ 서희 장군 신도비
▼ 서희 장군 부친이신 서필 신도비
▼ 서희 장군 사적비
▼ 서희 장군 묘 입구에서 바라본 현무봉과 그 우측으로 평평하게 내려온 묘역
▼ 서희 장군 묘 오르는 산길..
▼ 서희 장군 묘 문화재 안내판
▼ 서희 장군 묘역 전경
▼ 서희 장군 묘
▼ 서희 장군 묘표.. 부인 묘에 대한 언급이 없어 어느쪽이 부인 묘인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의 예로
보면 백호쪽이 서희장군, 청룡쪽이 배위 묘인데...
▼ 서희 장군 묘역에 있는 장명등.. 특이하게 배위쪽 한쪽에만 있다.. 아마도 양쪽에 있었는데 한쪽은
유실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 서희 장군 묘 장명등... 장명등 문양이 특이하다..
▼ 서희 장군 묘 석물
▼ 서희 장군 묘 입수처..
▼ 서희 장군 묘에서 바라본 조안산.. 해가 넘어가는 시각이라 뿌옇다
▼ 서희 장군 묘 후경... 앞쪽에 전순이 길게 뻗어있고 끝이 좌로 휘어져 있다.
▼ 서희 장군 묘 전순 끝에는 부친인 서필선생 묘가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서둘러 돌아오는 바람에
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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