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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양주]홍서봉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6. 8. 10:00


    홍서봉선생 묘


    홍지 묘를 지나면 연지가 나타나고 연지에서 북쪽으로 보면 산 허리쯤에 바짝 치켜올려진 묘역이 보인다. 

    이 묘가 홍서봉선생 묘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사격에 대한 것은 보기 힘들다.

    이런 때는 위성도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위성도에서 보는 홍서봉선생 묘는 앞에 연지를 두고 산진처에 

    위치해 있고 잘 짜여진 국세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물이 서출동류, 남출북류라고 표현되는 곳을 항상 주목해야 한다. 이곳 양주 땅은 서출동류하며, 또한 큰 

    물줄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홍서봉(洪瑞鳳)

     

    1572년(선조 5)∼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할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이며, 아버지는 도승지 홍천민(洪天民)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0년 사서가 되고 이어서 정언‧부수찬, 1602년 이조좌랑, 이듬해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다녀와 1606년 사예가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성‧응교를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0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장인인 황혁(黃赫)이 연루되어 삭직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병조참의‧이조참의‧대사간‧동부승지‧부제학‧대사헌‧병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626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을 고변,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조판서를 거쳐, 1630년 다시 대사헌이 되어 흉년으로 안팎이 곤궁할 때 사치가 심함을 지적, 이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우참찬‧이조판서‧좌빈객‧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634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어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대제학이 되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和議)를 주장, 최명길(崔鳴吉)‧김신국(金藎國)‧이경직(李景稷) 등과 청나라 군사진영에 빈번히 내왕하며 화의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1639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한재(旱災)로 인한 기민(饑民)의 구제를 위하여 부민(富民)들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모속(募粟)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0년부터 1645년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며 복잡한 대내외 사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국왕을 보필하였는데,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사하자 세손을 잇는 것이 상도(常道)임을 들어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일찍이 시명을 떨쳐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양주시 지정문화재 17호

    문화재명칭

    홍서봉묘역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상수리 산55-1

    관리자(연락처)

    남양홍씨

     

    홍서봉(洪瑞鳳)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할아버지는 관찰사 춘경(春卿)이며, 아버지는 도승지 천민(天民)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했고, 1594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정언·부수찬·이조좌랑·성주목사·경기도암행어사·응교 등을 역임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그뒤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장인 황혁(黃赫)이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관련되어 삭직당한 뒤 칩거했다. 1623년 김유(金瑬)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그뒤 병조참의·대사간·대사헌·병조참판·도승지 등을 역임했고,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역모를 고변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에 올랐다. 그뒤 예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좌참찬·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재직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이경직(李景稷)·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청나라 진영에 가 항복절차를 협의했다. 1639년 부원군(府院君)이 되었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사한 뒤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 세손을 삼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서·화에 능했고,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저서로 〈학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는 산기슭에 위치하며, 봉분은 쌍분 합장묘로 정경부인 장수 황씨와의 합장묘이다. 석물로는 신도비 1기, 묘표 1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 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좌측 하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 비각이 건립되었다. 비의 전체 높이는 389(cm)이고, 옥개 147x95x75, 비신 92x38x224, 좌대 168x112x90(cm)으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이다. 비문은 최석정이 찬(撰)하였고, 글씨는 윤순(尹淳)이 썼으며, 외현손 풍원군(豊原君)이 전(篆)을 했다. 글씨는 부분적으로 마모된 것이 많다.

    <양주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양주 남양홍씨(당홍계) 가계도

    홍상부
    전법좌랑
      홍지
    사재감직장
      홍경손
    첨지중추부사
      홍윤정   홍계정   홍춘경
    관찰사
      홍천민   홍서봉
    영의정
      홍춘년
    관찰사
      홍서룡   홍명현   홍처량
    이조판서

    ▼ 남양홍씨 묘역이 있는 양주 위성도와 물길...

    ▼ 홍서봉선생 묘 맥선도

    ▼ 양주 남양홍씨(당홍계)묘역

     

    ▼ 홍서봉선생 신도비각. 

    ▼ 홍서봉선생 신도비 및 묘역 안내판.. 안내판도 이렇게 하면 운치가 있어 좋다.

    ▼ 홍서봉선생 신도비... 비각의 창살을 너무 촘촘히 해놔서 사진이 잘 안나온다.

    ▼ 홍서봉선생 묘역 원경

    ▼ 홍서봉선생 묘... 6월초인데 벌써 풀이 무성하다.

    ▼ 홍서봉선생 묘 전경

    ▼ 홍서봉선생 묘표

    ▼ 홍서봉선생 묘 석물

     

    ▼ 홍서봉선생 묘 입수도두...

    ▼ 홍서봉선생 묘 후경

    ▼ 홍서봉선생 묘 앞쪽에 있는 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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