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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전주]친일파 이두황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6. 30. 10:00


    친일파 이두황 묘 


    친일파 묘를 일부러 보러 간다는게 좀 이상하지만 풍수공부를 위해서 답사를 하는 것이니 이해 바라고... 이두황은 화장을 하여 이곳에 뭍힌 것으로 나와있는데 묘역이나 주변 국세를 봐서는 화장이 어울리지 않는 묘역이다. 이곳은 석물이 특이하게 일본식으로 되어있고 특히 망주석과 묘비, 상석 등이 우리의 것과는 전혀 맞지않는 일본식이다. 내려오면서 자세히 보니 전순부분도 축대 등을 쌓아 만든 인작의 흔적이 보인다.

    본래 안산이 청룡자락의 본신안산이었겠지만 지금은 안산을 잘라버리고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건물들이 많이 들어와있어 본래의 모습은 찾기 어렵지만 유추해보건데 잘짜여진 국세인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8층 봉침으로 갑좌경향, 신술파로 자왕향으로 후손들이 재물의 덕을 넉넉히 볼 것 같다.



    친일파 이두황

     

    1858년(철종 9)∼1916년. 민족반역자.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공칠(公七)‧설악(雪嶽). 이명흡(李命洽)의 아들이며 모친은 조씨(趙氏)이다. 서울의 상인(常人) 출신으로 가난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을 시작으로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초토영중군(剿討營中軍)‧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竹山府使兼兩湖都巡撫營右先鋒)으로 승진을 하면서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하였다.

    특히, 동학의 북접(北接)들이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이들을 기습하였고,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함으로써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동학군과 이들의 합세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시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維鳩)‧노성(魯城)‧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륙하였고, 전주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대패시키고 전주를 탈환하였다.

    그뒤 장위영참령관으로서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정찰수행과 정보제공을 하였고, 평양백성을 부역시켜 청군의 시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1895년 훈련대 제2대 대장으로 민비시해에 가담하여 광화문경비를 담당하였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 진백(鎭白)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하여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생활 10여년 동안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으며,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하였다. 친일파를 부식하려는 이토(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가 되었고, 곧 의병투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의 관찰사 겸 재판소판사로 임명받았다.

    1910년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고, 그밖에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帝國在鄕後援會朝鮮支會全羅北道部會長) 등 일본 사회단체의 지부장도 겸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敍位)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유길준(兪吉濬)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특히 일본인들과 교유가 많았다. 또한, 일본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자기의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게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친일파 이두황 묘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산1-3번지

    관리자(연락처)

    인천이씨

     

    이두황(李斗璜)

     

    이두황(李斗璜, 1858년 1월 11일 ~ 1916년 3월 9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신, 군인이자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을미사변 당시 도성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한성부 출신으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1889년 흥해군수와 1894년 장위영 참령관(정3품)에 임령되는 등 능력을 인정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내포, 신창, 해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함께 평양에 진군한 것을 계기로 친일파 무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하면서 양주목사로 승진했고, 일본의 입김으로 창설된 훈련대의 제1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가 일본과 대립하면서 갑오개혁을 무력화시킨 뒤 친러파를 등용하면서 훈련대마저 해산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두황은 경복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에 우범선 등과 함께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담했다.

    을미사변 관련자 가운데 이주회와 박선 등은 사형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아 1907년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귀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중추원 부참의와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부터 1915년경까지 전라북도 장관 직에 있었다.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 중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작성한 진중일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발굴된 바 있다.

    <워키백과사전에서 인용>

     

    ▼ 친일파 이두황 묘비... 두(斗)자가 특이하며... 묘비 또한 처음보는 형태다..  

    ▼ 친일파 이두황 묘

    ▼ 친일파 이두황 묘 상석.. 상석도 특이하다.

     

    ▼ 친일파 이두황 묘비 측면

    ▼ 친일파 이두황 묘 앞쪽에 있는 특이한 조형물.. 아마도 망주석으로 보인다.

    ▼ 일본식 망주석으로 보이는 백호쪽 조형물

    ▼ 일본식 망주석으로 보이는 청룡쪽 조형물

    ▼ 친일파 이두황 묘비 윗쪽

    ▼ 친일파 이두황 묘비 아랫쪽

    ▼ 친일파 이두황 묘 측면

     

    ▼ 친일파 이두황 묘 후경...묘비의 뒷면 글자가 정으로 쪼여져 있다.

    ▼ 친일파 이두황 묘 입수도두...

    ▼ 친일파 이두황 묘 후경

     

    ▼ 친일파 이두황 묘 입구에서 바라본 기린봉...

    **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음 지도는 주소로만 올려놨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생략했으니 

    이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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