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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천안]홍대용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7. 10:00

    홍대용 묘

     

    충남 천안에 실학자로 이름 높은 홍대용 묘가 있다. 홍대용은 풍수를 강하게 부정하고 동기감응을 부정하면서

     "重刑을 당한 죄수의 고통이 그의 아들에게 옮겨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의 혼백에 대한

    감응은 터무니없다"라고 하여 풍수설의 동기감응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그런 한편 풍수를 인정하는듯한

    반응도 보였는데, "기술이란 허망하여 실제로는 그런 이치가 없지만, 그런 줄 믿어온 지 오래되어서 여러

    마음을 모으고 영(靈)을 합하면 무(無)에서 유(有)를 이룬다. 가끔 중인(中人)의 기교를 하늘이 따라

    주기도 하니, '쇠도 녹이고 뼈도 녹인다'는 말은 이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밝히고

    있다.

    요즘에도 풍수답산을 가면 어떤 분들은 강하게 부정하거나 강하게 긍정하는 분들이 보인다. 개인의 성격탓도

    있겠지만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도 쉽고,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자기 모순에 빠질 위험이 높아

    진다. 홍대용 묘 앞 조산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년(영조 7)∼1783년(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본관은 남양(南陽[1]).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담헌(湛軒)이라는 당호(堂號)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사간 홍용조(洪龍祚)의 손자로, 홍역(洪櫟)의 아들이다.
    1. 사상적 경향과 관력
    특히,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부정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으로부터 배웠고,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과는 깊은 친분이 있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및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이어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 그뒤 태인현감‧영천군수를 지냈다.
    2. 저서와 내용
    그의 활약은 이런 관직과 관련된 것이기 보다는 1766년초의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년 사이에 쓴 것이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6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였는데, 하나는 우연히 사귀게 된 항저우(杭州) 출신의 중국 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지게 된 일이며, 다른 하나는 북경에 머무르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이다.
    이때 북경에서 깊이 사귄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 등과는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한 교유가 계속되었고, 그 기록은 〈항전척독(杭傳尺牘)〉으로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그의 사상적 성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북경 방문은 〈연기(燕記)〉 속에 상세히 남아 있다. 그의 〈연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기록 가운데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문물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 사상
    지전설‧생명관‧우주무한론으로 전개되는 홍대용의 자연사상은 상대주의의 입장으로 일관된 것으로, 이와같은 상대주의는 그의 사회사상에 연장, 발전된다. 첫째,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쪽이 화(華)이고, 어느 쪽이 이(夷)일 수 없다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한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래의 인본적(人本的)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것으로 상대화하였다.
    셋째, 그는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과학사상과 그에 바탕을 둔 사회사상 등은 상당한 독창성을 보이고 있지만, 서양과학과 도교적인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서양과학의 근본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썼으며,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농수각(籠水閣)이라는 관측소에 보관하기까지 하였다.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사상, 그리고 지구중심적 세계관과 우주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의 가장 뛰어난 과학사상가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충남 도지정기념물 제101호
       홍대용 묘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462-22
      남양홍씨

     

     

     

     

     

     

     

     

      

     ▼ 홍대용 묘 입구.. 

    ▼ 홍대용 묘 안내판

    ▼ 홍대용 묘  안내석 

    ▼ 홍대용 묘 원경

    ▼ 홍대용 묘 전경

    ▼ 홍대용 묘... 묘비가 옆으로 세워져 있다. 묘비의 방향에 대해 특별히 연구된 것을 찾지는 못했지만

    내가 확인한 바로는 묘 광중의 시골의 방향과 묘비의 각이 서로 충(沖)을 할 경우 방향을 틀어 놓는

    것으로 보인다. 정면을 바라볼때의 비신의 몸체와 옆으로 세웠을때의 비신의 각도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를 염려하여 묘비 방향을 바꾼다고 보여진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 홍대용 묘비

    ▼ 홍대용 묘비 뒷면

    ▼ 홍대용 묘 망주석

     

    ▼ 홍대용 묘 상석

    ▼ 홍대용 묘 입수도두

    ▼ 홍대용 묘 후경... 멀리 조산이 뻥 뚫려있어서 맥이 손상되고 완전히 설기되고 있다.

    홍대용은 풍수를 강하게 부정한 인물로 그래도 후손들에 의해 좋은 안식처를 누려오다 근자에

    이런 험한 상황을 보고 있다. 한치 앞을 못보는 것이 우리 인간인데... 너무 과하게 살지 맙시다.

    ▼ 홍대용 묘 청룡쪽 후경

    ▼ 홍대용 묘 백호쪽 후경

    ▼ 홍대용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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