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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이무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7. 25. 10:00

    이무 묘 및 신도비

     

    고양시 묘지답사는 작년 가을경에 이뤄졌는데 그동안 다른 묘를 올리느라 답사기를 올리지 못했다. 

    이제부터 올리지 못한 답사기를 하나하나 찾아서 올릴 예정이다.

    이무선생 묘는 고양시청 뒷편으로 안으로 깊숙히 들어간 지점에 있다. 앞쪽에 사당이 있고 그 뒷편

    으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묘역에 이른다. 조선전기 형태대로 묘는 사각방형이고 앞쪽이 올라챈 

    형태의 유혈이다.

    이때만 해도 묘역이 앞쪽이 올라간 형태를 선호해서인지 거의 유혈로 된 묘가 많다.

    나뭇잎이 떨어진 늦가을에 갔는데도 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사격은 볼 수가 없다. 

    바람도 없고 아늑하게 여겨진다.

    이무(李茂)
    미상∼1409년(태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돈부(敦夫).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에 밀직사사가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이인임(李仁任)의 당으로 몰려 곡주(谷州)로 유배되었다.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에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조정의 특명으로 경상도의 군사를 점검하였고, 그뒤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강서(江西: 禮成江)‧강화 등지의 병선을 점검하여 요소에 배치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1396년에 조정에서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그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1398년 참찬문하부사‧판예조사‧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가 되었으며, 그해 연말에 세자 방석(芳碩)의 보필을 맡고 있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松峴: 松峴洞)에 모여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방원(芳遠)에게 밀고하여 그들을 급습,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2등에 책훈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겸 의흥부윤(義興府尹)이 되었다. 그해 7월에 남은‧정도전과 친교가 두터운 불충지당으로 지목되어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곧 근기(近畿)에 안치되었다가 9월에 풀려났다.
    그해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어 방원을 도와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1등에 책훈되었다.
    1402년(태종 2)에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가 되었다.
    1409년에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 옮겨져 그곳에서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그는 문관으로 입신하였으나 문무를 겸비하여 왜구의 격퇴와 대마도정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06년 김사형‧이회(李薈) 등과 더불어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광피도(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이 만든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정리, 합편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과 일본을 넣어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만들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문화 제9호
       이무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75
       단양이씨


    묘는 貞敬夫人 尹氏가 합폄되어 있으며 주교동 원당중학교 뒤편의 영글이산기슭에 위치한다. 묘 앞의 석물로는 상석 외에 石羊, 장명등 및 문인석 2쌍과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正祖 9년(1785)에 건립된 백대리석 묘갈의 규모는 높이 138㎝, 두께 20㎝, 너비 65㎝이다. 묘소의 입구에는 고종 15년(1878) 10월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으며 너비 66㎝, 두께 35㎝, 높이 174㎝ 규모의 오석으로 옥개와 기단을 갖추었다. 또한 신도비 옆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永慕碑가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이무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敦夫이며 호는 中亭이다. 본관은 丹陽으로, 판서 李居敬의 아들이다. 조선 개국 후 開城尹, 都體察使, 參贊門下府使, 判三軍府事, 右政丞, 領丞樞府事, 右政丞 兼 判兵曹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2년(1402)에는 金士衡, 李회와 함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인 『混一疆理歷代國之圖』를 제작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후 태종 8년(140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竹州로 이배 도중 괴한들에 의하여 피살 당하였다. 뒤에 伸寃 되었으며 시호는 翼平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이무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판..

    ▼ 이무선생 사당 앞에 있는 비석군... 영모비..

    ▼ 이무선생 사당 앞에 있는 옛비석... 부친 이거경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이무선생 신도비

    ▼ 이무선생 묘(사당) 재건비...

    ▼ 이무선생 사당

    ▼ 이무선생 묘역 전경

    ▼ 이무선생 묘

    ▼ 이무선생 묘 근경

    ▼ 이무선생 묘표

    ▼ 이무선생 묘비... 구 묘비를 신묘비로 옮겼다.

    ▼ 이무선생 묘 상석...

    ▼ 이무선생 묘 석물... 묘에 석양을 배치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이무선생 묘 석물... 특이하게도 문인석1쌍 외에 근자에 세운 석물이 있는데 청룡쪽에는 무인석, 

    백호쪽에는 문인석을 세웠다. 아마도 이무선생이 문과로 급제한 뒤 무인으로 이름을 날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누군가 이는 잘못 알고 한 것같다. 사대부 묘역에 무인석을 세우는 것도 역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안되겠지만 문,무인석을 혼합한 예를 본 적이 없다. 누군가 착각한듯 보인다.

    ▼ 이무선생 묘 입수도두...

    ▼ 이무선생 묘 후경

    ▼ 이무선생 묘 후경.. 청룡쪽

    ▼ 이무선생 묘 후경.. 백호쪽

    ▼ 이무선생 묘 후경... 묘 위치가 유혈이면서도 빽빽한 산림과 나성에 둘러싸여 있어서 온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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