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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안산]강징선생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8. 9. 10:00

    강징선생묘 및 신도비

     

    강징선생 묘는 예전 안산 답사 시에 한번 다녀온 곳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예전에 다녀올 때는 무척 깊숙히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두번째 찾을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주위 산세를 관망하게 되고 물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한번 만으로는 안되고 여러번

    찾아가야 제대로 답사를 하게된다고 했나보다.

    안산에는 많은 선현 묘가 있다. 그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라도 일일이 다 답사를 할 요량으로

    표를 만들어 하나하나 찾아나섰는데 일부 묘들은 철조망으로 막아놓아 접근할 수 없게 되어있다.

    유난히 안산에 그런 묘가 많다. 답사할 때 이런 묘를 만나면 짜증이 밀려온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관리를 위해 어쩔수 없다면 최소한 관리인 연락처라도 적혀있어야 할 것이다.

    안산시 문화담당자께서는 이 점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

    강징(姜澂)
    1466년(세조 12)∼1536년(중종 31).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심(彦深). 강이행(姜利行)의 아들이다.
    약관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에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로 보임되고, 다시 예문관검열‧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 등을 거쳐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 경연관(經筵官)으로 8년 동안 재직하였다.
    강학을 할 때는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므로,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하여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부제학 등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으나, 그해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모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을 자청하여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21년(중종 16)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뛰어난 글씨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돌아와서 지중추부사‧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은 그를 시켜 옛 명현들의 명언과 시문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놓고 선비들과 백관들이 처신의 거울로 삼도록 하였다. 필법은 당대에 으뜸이었다 한다.
    글씨로는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神道碑)〉‧〈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楨碑)〉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안산시 향토유적 제3호
       강징선생묘 및 신도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16-3
       진주강씨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재(少齋), 심재(深齋), 본관은 진주(晉州),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행(利行)의 아들. 성종25년(1494)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 우부승지(右副承旨) 로 왕에게 사냥을 삼갈 것을 말했다가 낙안(樂安)에 유배되고 연산군 12년(1506) 복세암 (福世庵)의 이건(移建)을 반대하여 투옥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석방되어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중종 3년(1508)과 중종 16년(1521)에 각각 성절사(聖節使)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주(全州)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중종이 제작한 병풍의 글씨와 명신(名臣)들의 시문(詩文),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정명도(程明道)의 잠(箴)을 쓰니 당대의 명필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밖에 글씨로 <정익혜공난종신도비명 (鄭翼惠公蘭宗神道碑銘)이 있다. 묘는 현 안산시 양상동에 있다..

    <안산시청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가족관계>

    공은 5남을 두었으니 장남 강희(姜僖)는 신창 현감(新昌縣監)을 지냈고, 차남 강의(姜儀)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그 다음 강억(姜億)은 왕자 사부(王子師傅)를, 그 다음 강엄(姜儼)은 병절교위(秉節校尉)를, 그 다음 강위(姜偉)는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측실에서 2남 2녀를 두었으니, 강준(姜俊)과 강임(姜任)이다. 

     장남 강희는 첨지(僉知) 김봉서(金鳳瑞)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동생의 아들 강응서(姜應瑞)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강의는 부사(府使) 권세형(權世衡)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강몽서(姜夢瑞)와 강응서인데, 강몽서는 진사(進士)이고, 큰 딸은 구윤덕(具潤德)에게 시집갔다.  

    강억은 판관(判官) 유응대(柳應臺)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강명서(姜命瑞)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강엄은 현감 김효윤(金孝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강창서(姜昌瑞)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강위는 감찰(監察) 신수견(辛壽堅)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강징선생신도비명 번역본에서 발췌>

    ▼ 강징선생 신도비...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다.  

    ▼ 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강징선생  묘역..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강징선생 묘 현무봉...

    ▼ 강징선생 묘 안내판... 

    ▼ 강징선생 묘 앞에 있는 약수... 예전에는 물이 넘치더니 지금은 물이 말라있다.  일반적으로

    묘역 앞에 있는 이런 약수를 진응수라 하여 무척 귀하게 여긴다. 

    ▼ 강징선생 신도비..  묘역 입구 계곡에 세워져 있다.

    ▼ 강징선생 신도비 이수부문... 

    ▼ 강징선생 묘 전경 .. 묘역은 능선 윗쪽에 바짝 올려져 있다.

    ▼ 강징선생 묘 

    ▼ 강징선생 묘 근경

    ▼ 강징선생 묘비

    ▼ 강징선생  묘 장명등 

    ▼ 강징선생  묘 석물 

    ▼ 강징선생  묘 입수도두 

    ▼ 강징선생  묘 후경 

    ▼ 강징선생 묘 청룡, 백호쪽 후경 

    ▼ 강징선생 묘 후경.. 안산을 왼쪽 높은 탐랑봉으로 하지않고 앞쪽 낮으막한 봉우리로 정했다.

    왼쪽 높은 봉우리가 골이 깊고 높아 방향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 강징선생 장남 강희 묘비...장남 강희(姜僖)는 신창 현감(新昌縣監)을 지냈고,  첨지(僉知)

    김봉서(金鳳瑞)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동생의 아들 강응서(姜應瑞)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 강징선생 장남 강희 묘 ... 아버지 묘 바로 아래에 위치..

    ▼ 강징선생 장남 강희  묘 석물

    ▼ 강징선생 장남 강희 묘 후경...

     

    ▼ 강징선생 차남 강의(姜儀) 묘... 강의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냈고, 부사(府使) 권세형(權世衡)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강몽서(姜夢瑞)와 강응서인데, 강몽서는 진사(進士)이고,

    큰 딸은 구윤덕(具潤德)에게 시집갔다.

    ▼ 강징선생 차남 강의 묘비.. 강희 묘 아래 위치..  

    ▼ 강징선생 차남 강의 묘 석물 

    ▼ 강징선생 차남 강의 묘 후경 

    ▼ 강징선생 묘역 답사 시 진달래가 많이 피었었다.

    ▼ 강징선생 묘역에서 바라본 신도비.. 계곡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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