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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남양주]광해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0. 4. 10:00

    광해군 묘

     

    아들 딸이 추석 때 '광해'라는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않아 나는 못보고 아이들만 봤는데,

    개천절을 맞아 광해군 묘역을 보여주고 싶어서 집을 나섰다. 예전의 사릉 부근 송능리를 가려면 무척

    힘들게 찾아갔지만 지금은 뻥 뚫린 도로를 타고 집에서 가다보면 신호등 한번도 만나지 않고 막바로

    갈 수 있어 정말 좋은 세상이 된 것 같다.

    사릉 부근은 정순왕후의 한이 서려 있어서 인지 왠지 어둡고 애잔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더구나 광해군 묘를

    보게되면 그 느낌이 더욱더 심해진다. 광해군 묘를 처음 찾았을 때는 별다른 자료 없이 지도 한 장 만 들고

    물어물어 찾아왔지만 끝내 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그 후로 여러 번 답사하고 찾아왔는데

    블로그에 있을 법도 한데 광해군 묘 자료가 없어서 나도 놀랬다. 아마도 블로그 만들기 전에 다녀온 곳이어서

    자료를 미쳐 올리지 못한 것 같다. 왕릉에 관한 자료 또한 블로그에 답사기를 올리지 못해 자료가 비어있다.

    이곳은 오후만 되어도 숲이 우거져있어 그늘이 지는데 오늘은 조금 일찍 나서서 인지 햇빛이 묘역을 비추고 있다.

    음산한 기운이 항상 감돌던 곳인데 오늘은 밝은 기운이 들어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곳을 방문 하려거든 오전에 하는 것이 훨씬 좋을 듯 싶다.

    '광해'라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아이들 말로는 아주 재미있다고 하는데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왕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재미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슬픔을 빗대어 희극화하지 않았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영화도 안 봤으니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광해군은 어찌보면 억울한 폐위를 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 그를 반정의 희생양으로 만들었지 그는 경제,문화,외교적으로 현명한 처신을 하였다.

    인조의 반정 명분 3가지 조차도 거의 어거지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옮겨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죽으면서 유언으로 어머니(공빈 김씨) 발치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공빈

    김씨의 성묘 안산에 광해군 묘가 있게 되었다. 일설에는 시신이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광해군, 공빈김씨(선조의 후궁), 임해군(광해군 친형)을 차례로 들러보면서 역사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무튼 이곳 송능리는 광해군과 그 어머니,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의 형 임해군이

    한 곳에 모여있어서 역사 공부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선조 8)∼1641년(인조 19). 조선 제15대왕. 재위 1609년∼1623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혼(李琿).
    1. 잠룡시절의 행적
    선조의 둘째아들. 모친은 공빈김씨(恭嬪金氏).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광패(狂悖)하다고 하여 보류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2. 영창대군 살해 전말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이듬해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백여인의 소북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하였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이듬해 살해하였다.
    3. 인목대비 폐비‧창덕궁 중건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편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4. 외교정책
    이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마침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으나, 부차(富車) 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5. 인조반정
    그의 재위 15년간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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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사적 제363호
       광해군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산59(영락교회묘원 가는 길 중간)
       문화재청


     

     

     

     

     

     

     

     

     

    ▼ 송능리 영락교회묘원으로 가는 길 중간에 광해군 묘가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왕 대접을 못받는

    분인데... 여기 영문자에 King Gwanghaegun으로 나왔으니 그가 안다면 기분은 좋을듯.....ㅎ

    ▼ 광해군 묘가 있는 영락교회묘원 가는 길

    ▼ 아침에 방문을 해서인지... 숲 속으로 햇살이 많이 비춘다

    ▼ 길도 새롭게 냈고 방범용 카메라도 설치하고 아마도 나무도 많이 베어낸듯... 햇빛이 들어 좋아 보인다.

    ▼ 광해군 묘 전경... 앞에 출입금지 줄을 쳐놔 보기 흉하다.. 

    ▼ 광해군 묘 안내판 

    ▼ 광해군 묘 사적표식비 

    ▼ 광해군 묘 전경

    ▼ 광해군 배위 문성군부인 유씨 묘 전경

    ▼ 광해군 묘 장명등... 여기저기 총탄 흔적이 많이 보인다.

    ▼ 광해군 묘표

    ▼ 광해군 배위 유씨 묘표

    ▼ 광해군 묘 석물... 왕릉이 아니라서 무인석은 없다. 망주석은 통상 곡장 안쪽으로 들어가는게 정상인데

    곡장 바깥쪽으로 나와있어서 설기 시킬려고 일부러 그렇게 조성했다는 설도 있다.

    ▼ 광해군 묘 청룡쪽 석물... 저 망주석은 언제나 고쳐지려나...

    ▼ 광해군 묘 입수도두...

    ▼ 광해군 묘 후경

    ▼ 광해군 묘 곡장에 새겨진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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