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공주]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2. 8. 10:00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
충청도 일원 답사를 할 때 다녀온 곳으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직접 답사일정을 짜서 다녀온 곳은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지만 답사팀을 따라서 다녀온 곳은 차에서 계속 잠만 자다가 내리라고 하면
내려서 답사를 하는 바람에 위치파악이 매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답사기를 쓰려고
찾아보면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곳은 사진으로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곳이지만 어디에 있었는지 그 기억이 없다.
주소를 보고서야 대략 가믈 잡았다. 넓은 묘역과 잘 가꿔진 묘역이 인상이 깊다.
계백장군(階伯將軍)
?∼660(의자왕 20). 백제 말기의 장군.
계백(堦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5만여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 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오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황산(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連山)벌에 나가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해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해 세 진영으로 나뉘어 연합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결사대 5,000명의 용맹은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연합군과의 네 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해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戰勝址) 충남 논산시 충청남도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역 전경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역 홍살문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역에 있는 충장사.
▼ 충장사 안내판
▼ 충장사에서 바라본 홍살문
▼ 계백장군(階伯將軍)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역을 오르는 길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 전경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비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 입수도두
▼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 묘 후경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2]유석 조병옥(趙炳玉) 박사 묘 (0) 2012.12.11 [서울 강북]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총괄) (0) 2012.12.10 [충남 공주]절재 김종서장군 묘 (0) 2012.12.07 [충남 공주]좌의정 김국광(金國光) 묘 (0) 2012.12.06 [충남 공주]신독재 김집(金集)선생 묘 (0) 201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