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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 원주]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와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3. 16. 10:00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와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원주답사 시에 한돈원선생 묘를 찾다가 못찾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을 회관에 들러

    여쭤보니 친절하게도 어른께서 직접 안내를 해주신다. 찾고보니 한돈원선생이 아니라

    월봉 한기악선생이었다. 그런데 한기악선생 사적비 바로 위쪽에 묘가 있어서 한기악선생

    묘인줄 알고 올랐더니 왠걸... 한돈원선생 묘였다.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한기악선생 묘는

    남양주에 있었다.

    아무튼 한돈원선생 묘를 찾다가 한기악선생 사적비를 알게되어 별도로 올리려다 한 구역

    안에 있는 두분의 사적이어서 한데 묶어 올린다. 두분의 생애는 거의 80여년의 차이가

    나지만 한마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두분의 관계가 가까운 관계인 것은 분명한데 찾지

    못하다가 실학사상 글을 읽다가 두분의 관계를 알았다. 즉 한돈원의 증손이 한기악이었다.

    한기악의 자식과 손자 등 후손들 대부분이 대학교수이다. 기회가 되면 남양주에 있다는

    한기악의 묘를 답사해봐야 왜 자손들이 대학교수가 많고 대부분 서울대를 나왔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돈원(韓敦源)
    1820(순조 2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형(公兄). 서울 출신. 광적(光迪)의 증손이며, 치응(致應)의 손자로, 진정(鎭庭)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에 홍문관관원으로 발탁되었다.
    1867년(고종 4) 성균관대사성, 1868년 이조참의, 1871년 대거승지(對擧承旨)를 역임하였다. 1872년 송도유수(松都留守)로 부임할 때 성역(城役)을 잘 수행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 의하여 포장(褒奬)됨으로써 가자(加資)되었다. 또한, 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다 되었으나 송도민이 간청하여 유임되기도 하였다.
    1873년 정사 이근필(李根弼), 서장관(書狀官) 조우희(趙宇熙)와 함께 부사의 직책으로서 중국에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 또한, 1876년에 공조판서에 올랐는데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1880년 다시 공조판서로 부임하여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직, 공역(工役)을 인정받아 가자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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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연락처)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청주한씨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전경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는 별도의 묘비가 없이 상석에 비명을 새겼다. 묘가 아주 단촐하다.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망주석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측경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입수도두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후경... 앞쪽의 강이 남한강이다. 향선이 앞산의 끝을 맞췄다.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청룡쪽 후경... 앞산은 내청룡이 아니고 안산으로 다가온 산인데 향선을 지나치지 못했다.

    이럴 때는 외청룡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백호쪽 후경... 남한강이 앞으로 오다가 백호방 밖으로 빠져나간다.

    ▼ 예조판서 한돈원(韓敦源) 묘 원경

    ▼ 청주한씨 재실... 아늑한 곳에 깊숙히 들어앉아 있다.

     

    한기악(韓基岳)
    1898∼1941. 독립운동가.
    자는 명오(明五), 호는 월봉(月峰). 강원도 원성 출신.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곧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귀국해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아일보』 창간에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 운영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하면서 한국청년의 진로 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필봉으로 동을 격려, 고무해 일제의 탄압 일변도의 만행을 규탄, 성토하였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시대일보(時代日報)』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해에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언론 동지인 송진우(宋鎭禹)·민태원(閔泰瑗)과 같이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인재 교육에 헌신하면서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가족관계]
    첫째 아들: 한만춘 (韓萬春, 1921년 6월 26일 ~ 1984년 8월 5일)- 전 연세대학교 공학대학 학장
    둘째 아들: 한만년(韓萬年, 1925년 10월 29일 ~ 2004년 4월 30일)- 출판사 일조각 창립자
    셋째 아들: 한만청-전 서울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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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한돈원 증손)
      
       청주한씨


     

     

     

     

     

     

     

     

     

    ▼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앞에 있는 안내판... 원주역사문화순례길로 연결되어 있다.

    ▼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가 있는 곳은 청주한씨(한백겸 후손)들의 집터이다.

    ▼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후면

    ▼ 월봉 한기악(韓基岳) 사적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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