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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화성]부자대제학 이복원(李福源), 이만수(李晩秀)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2. 10:00

    부자대제학 이복원(李福源), 이만수(李晩秀) 묘

     

    이왕 화성 비봉에 간 김에 부자대제학으로 알려진 이복원, 이만수, 이시수(영의정) 묘를 답사하기위해 

    쌍학리에 들어섰다. 보기좋은 산세가 큰 인물이 뭍혀있을 법한 산세다.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구릉에 묘지가 보이긴 한데 거의 요즘에 쓴 묘역이고 오래된 묘가 보이질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논밭 한가운데에 묘가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너무나 실망한다. 관리가 안되어 엉망이 

    되었고, 잔디는 없고 억새만 묘역 전체를 감았다. 묘 곡장은 무너지고 찬바람이 쌩쌩 분다.

     

    조선조의 '문형'이라 불리는 대제학은 총 133명인데 이 중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고, 

    5명 이상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 7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 7명, 신안동김씨(장동김씨) 6명, 달성서씨 

    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 5명 등 7씨족뿐이다.

    또한 조선 역사상 3대 대제학이 배출된 집안으로는 광산김씨 사계 자손, 연안이씨 월사 가문(정귀廷龜―

    명한明漢―일상一相) 외에도, 전주이씨 밀성군파(密城君派)의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자손으로

     '민서敏叙 ―관명觀明―휘지徽之' 달성서씨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자손으로 '유신有臣―영보榮輔―

    기순箕淳(1791-1854)' 등이 또한 그러하였다.<인터넷에서 인용>

     

    대제학이 얼마나 큰 벼슬인지 잘 몰랐었는데 조선조에 133명 뿐이라니 놀랐다. 대제학은 종신직이어서 

    이렇게 적은 인원만 배출된듯 하다. 품계는 정2품으로 낮지만 삼정승보다도 높게 대우하였다한다.

    부자대제학의 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가 허술한데 문중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복원 묘비는 

    1800년에 세워졌는데 장남인 이시수(영의정)가 찬하고 차남 이만수(대제학)가 글씨를 쓴 것으로 원래의 

    것이다. 이만수의 묘비는 형인 영의정 이시수가 찬하고, 신적이 글씨를 썼다. 두 묘비가 원래의 것으로 

    부자대제학을 기념할만 하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지정이 된다면 좀더 체계적인 관리가 되지 

    않을까?

    봄바람이 차가운 날 시간에 쫓겨 건성으로 답사를 하면서도 싸한 바람처럼 묘역에 찬바람이 쌩쌩부는 걸 

    보면서 잠시 생각해본 것이다.

    이복원(李福源)
    1719(숙종 45)∼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정구(廷龜)의 6대손이며, 봉조(鳳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신(正臣)이고, 아버지는 판서 철보(喆輔)이며, 어머니는 박필순(朴弼純)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에 1754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무학(懋學)·근정(勤政)·신질(愼疾)·납언(納言) 등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헌납(獻納)·교리·승지·대사간·이조참의, 예조·병조·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772년 당시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上號)를 지어 바치고 영조에게서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1773년 한 때 사직했으나, 이듬 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증광시 시관(試官)에 임명되고, 177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행장·시장(諡狀)을 찬술하기 위한 찬집청(撰集廳)의 당상에 임명되었고 영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바쳤다. 우참찬·병조판서·명의록찬집당상(明義錄纂輯堂上)·형조판서·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관아를 비웠다 하여 강화유수로 좌천되고 이어 사형수의 자살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1780년(정조 4)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부(世子傅)·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1783년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783년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璿源系譜紀略八高祖圖)』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해 이치를 주로 했고, 특히 사명(詞命)에 뛰어나 정조가 신설한 규장각에서 활약하였다. 김익(金熤)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 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해 당시 유상(儒相)으로 불렸다 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부자대제학 이복원(李福源), 이만수(李晩秀) 묘
      
       연안이씨


     

     

     

     

     

     

     







    ▼ 대제학이자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전경..뒷쪽 현무봉이 아름답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청룡쪽 후사면에 근사한 사격이 보기 좋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근경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묘역에 물기가 가득하고 잔디는 없고 억새로 뒤덮혀있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비... 장남 영의정 이시수가 짖고 차남 대제학 이만수가 쓴 것이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망주석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입수도두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뒷쪽으로 현무봉이 보인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맥선상에 놓인 폐가...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후경... 넓은 국세에 포근한 보국인데 묘역을 지근에서 감싸주는 사격이 없어 바람이 쌩쌩분다. 그래서 곡장을 둘렀는데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넘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묘 후경.. 아카시아 잡목이 묘역을 덮기 전에 관리를 해야한다.

     

    이만수(李晩秀)
    1752(영조 28)∼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정신(正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철보(喆輔)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복원(福源)이며,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 :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선발하기 위해 작성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기록)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했으며, 이듬 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 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했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학․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801년(순조 1) 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 유지를 잘못했다는 죄로 이듬 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 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갔다가 그 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써 정주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극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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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부친 이복원 묘 아래에 있다.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전경... 고무 호스와 비닐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수기가 묘역 전체를 뒤덮었다.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비... 형 이시수(영의정)가 짖고 신적이 글씨를 썼다. 글씨가 아주 예쁘다..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석물..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찢겨지고...

    ▼ 망주석을 휘감고 돈다.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측후경...

    ▼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묘 측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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