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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4. 10. 23. 09:00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및 신도비
경북 예천 정사선생 묘를 가는 중간에 다른 묘가 없나 확인을 해보니 문경에 홍귀달선생 묘가 있다. 마침 후배가 이 묘를 가보라고 해서 찾아나섰다. 네비게이션 입력을 잘 못해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30분정도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가을 들판이 노랗게 변한 시절에 풍수답사는 참으로 눈맛이 즐겁다. 아침 일찍 찾았더니 동네 어르신들이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 몇 장 찍고 묘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후손들이 마을에서 살면서 묘역관리 등을 하고 있다고 동네 어르신이 전해준다. 후손들이 잘 되었냐고 물었더니 크게 된 사람은 없다고 한다. 풍수답사를 다닐 때는 동네분들이나 묘역 주변들에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으며 특히 중요한 단서도 찾게 되는 행운도 누릴 수 있다.
홍귀달(洪貴達)
1438(세종 20)∼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사재감정 순(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득우(得禹)이고, 아버지는 증 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에 등용, 예문관봉교로 승직하였다. 1466년 설서가 되고 선전관을 겸하였다. 이듬해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정랑에 승직하면서 예문관응교를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교리가 되었다가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홍문관전한과 예문관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직제학·동부승지를 거쳐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로 복직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1483년≪국조오례의주 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15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명감 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 : 원통함을 풀어버림)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허백정문집 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홍귀달선생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홍귀달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으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10여건에 달하는 왕의 난정을 간하다가 좌천되었고, 1504년(연산군 10)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교살된 문신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숙종 때 문광(文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비는 1534년(중종 29)에 건립되었는데, 홍문관 대제학 남곤(南袞)이 찬하고, 아들 언국(彦國)이 글을 썼다.
비문은 판독이 어려우나 부림홍씨(缶林洪氏) 세덕록(世德錄)에 그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근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비는 전체 높이가 374㎝로서, 귀부·비신·이수의 3부분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문화재명칭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경상북도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및 신도비 입구 안내판...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및 신도비 입구에 있는 마을....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각...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각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각... 동네 어르신들이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일찍부터 나와 계신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안내판... 너무 낡아서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이수부문...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귀부...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와 들판....
▼ 홍귀달(洪貴達)선생 신도비 옆에 있는 커다란 돌... 혹시 고인돌이 아닐까 싶어 여쭤봤더니 최근에 가져다
놓은 돌이란다. 뒤쪽으로 선생의 묘가 보인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재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원경...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입구...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들어가며...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전경....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표...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표가 뒤로 기울어져 있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문인석...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후경...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후경... 앞쪽이 넓게 열려있어 좌우로 나무를 배치하여 폭을 좁게 해주고 있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앞쪽 조안산이 화려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형태는 멋지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청룡.... 신도비각이 보인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뒤에는 선생의 부모 묘가 있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부모 묘에 있는 특이한 석물... 홍귀달 선생 묘에도 부러진 기둥만 보인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부모 묘 전경...
▼ 홍귀달(洪貴達)선생 부모 묘표.. 판독이 안되는데 동네 어른에게 확인해 본 결과 부모 묘라고 하신다.
▼ 홍귀달(洪貴達)선생 부모 묘 문인석....
▼ 홍귀달(洪貴達)선생 묘 앞에 있는 후손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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