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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128)중학당 터(中學堂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5. 1. 10. 09:00

     

    표 석 명

    중학당 터(中學堂址)

    임시관리번호

    종로128

    설치연도

    1989

    표석문안

    이곳 북부 관광방(北部 觀光坊)에 있던 조선시대 한성 4부학당의 하나인 중학당 터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중학동 83

    찾아가는 길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280m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끼고 우회전-->120m 사거리 더케이트윈타워 모퉁이 위치

    관계되는 내용

    사부학당(四部學堂)

     

    조선시대 중앙의 4부(部)에 설치된 관립교육기관으로 사학(四學)이라고도 함.
    동부학당·서부학당·남부학당·중부학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등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전신은 고려 원종 2년(1261)에 설립된 동서학당(東西學堂)으로, 동부와 서부에 설치하여 각각 별감(別監)을 두고 가르쳤다. 그 뒤 유교가 성하게 되자 개경(開京)의 각부에 학당을 세워 오부학당(五部學堂)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서울을 동·서·중·남·북의 5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우기로 하여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개국 직후라서 국가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초기에는 학당의 건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임시로 사찰의 건물을 빌어서 사용하였다. 즉, 동부학당은 순천사(順天寺)를, 서부학당은 미륵사를 이용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뒤 왕권이 확립되고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자, 1411년(태종 11)에 남부학당이 한성부(漢城府) 남부 성명방(誠明坊)에 독립된 학당으로 건립되었다. 이와 함께 같은해 11월 예조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의 외학제(外學制)를 토대로 오부학당의 학제가 마련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오부학당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업무를 분담하여 교육하게 하고, 6품관 2원(員)을 교수관(敎授官), 7품 이하관 5원(員)을 훈도(訓導)로 삼되 반드시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교육임무를 전담하며, 아울러 성균관에서의 임무는 맡기지 않는다.
    ② 학당의 정도는 10세 이상된 아동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15세에 이르러 소학(小學)의 공(功)을 이루면 성균관에 진학하게 한다.
    ③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100명인데 만약 그 정원이 비게 되면 예조와 성균관의 관원이 학당에 나아가서 생도들의 실력을 시험하여 그 중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여 결원을 보충한다.
    ④ 학당 생도들의 학과공부를 권려하는 법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⑤ 학당의 학령(學令)은 성균관의 식(式)에 따른다.
    ⑥ 성균관원이 학당의 교육을 맡게 되면 교훈(敎訓)만을 맡기고 다른 업무는 겸임시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오부학당의 학제가 마련됨으로써 이후 학당의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대까지는 남부학당 외의 다른 학당은 아직 독립적인 학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유학의 진흥과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힘쓴 세종대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1422년(세종 4) 12월에, 그때까지 남부학당 건물을 빌려쓰고 있던 중부학당의 독립학사가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현재 종로구 중학동)에 신축되었다.
    서부학당은 서울 북쪽에 편재해 있던 경고(京庫)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아침저녁 내왕이 크게 불편하였기 때문에 1435년(세종 17)에 이르러 한성부 서부 여경방(餘慶坊:현재 종로구 광화문)에 독립학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사찰을 이용하고 있던 동부학당은 같은해 8월에 동부학당을 보수하도록 명한 것으로 보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미 그 이전에 독립적인 학사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동부학당의 건물은 1438년(세종 20) 3월에 북평관(北平舘)으로 되고, 그 대신 한성부 동부 창선방(彰善坊: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안)에 있던 유우소(乳牛所)가 동부학당의 건물로 되었다.
    이와 같이 사부학당으로 정비되는 데 큰 힘을 기울인 사람은 당시 예조참의로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제조(提調)를 겸임하고 있던 허조(許稠)였다.
    그러나 북부학당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고 1445년(세종 27)에 폐지되었으며, 성종 때 편찬, 반포된 ≪경국대전≫에 중학·동학·남학·서학의 사학이 종6품의 아문(衙門)으로 법제화됨으로써 한성부에는 사학만을 두게 되었다.
    사부학당은 성균관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교육정도가 낮으나 교육방법·교육내용 등에서는 성균관과 비슷하였다. 따라서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띠었으며, 성균관과는 달리 문묘(文廟)를 설치하지 않고 교육만을 전담하였다.
    학생정원은 학당마다 100명이었으며 재사(齋舍:기숙사)제도를 마련하여 학비 및 운영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학생의 교육을 위하여 학전(學田)·노비·잡물 등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써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교관 이하 학당에 필요한 모든 인원은 성균관에 소속된 인원이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교수·훈도 각 2명을 두고 성균관 관원으로 겸직하게 하였으나 뒤에는 각 1명씩을 감하는 대신 겸직을 없앴다. 또한 성균관·예조·사헌부의 직원으로 하여금 학당의 수업상태를 항상 감독하도록 하였다.
    입학자격은 양반과 서인의 자제로서 8세가 되면 입학을 허락하여 ≪소학≫과 사서오경을 위주로 교수하였으며, 그 밖에 ≪근사록 近思錄≫과 제사(諸史) 등을 다루었다. 성적이 우수한 자로 15세가 되어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진학시켰다.
    학당에서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에서는 매달 시험을 쳐서 1년의 성적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15일은 제술(製述), 15일은 경사(經史)를 감독하여 우수한 사람 5명을 뽑아 생원·진사시험에 직접 응시하게 하였으며, 매년 실시되는 6월회시(六月會試)의 우등자도 1, 2명은 생원·진사의 회시에 직접 응시하게 하였다. 그 밖에 유생에게 원점(圓點)에 따라 알성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유생들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유소(儒疏)·권당(捲堂) 등의 학생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새로이 진출한 사림(士林)을 도와 훈구관료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학당은 실제운영에 있어서 입학하는 학생수가 정원보다 적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 등으로 보아, 교육활동은 다소 부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건물을 지었으나 학생수가 격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말에는 관학의 부진과 함께 신교육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자연 소멸되었으며, 사부학당을 본떠 신교육기관의 명칭을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 모든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었으나, 사부학당의 제도는 중국에도 없었던 것을 고려 말 유학진흥의 현실적 요청에 따라 설치하여 발전을 본 것이다. 또한 행정단위로 학당 설립의 기준을 마련하였다는 것은 정치·행정력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때의 향교가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한 데 비하여 사부학당은 중앙의 관학으로서 중등교육을 담당하여 온 교육제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중학당 터(中學堂址) 표석 

    ▼ 중학당 터(中學堂址)에 있는 복원된 유구 표석

    ▼ 중학당 터(中學堂址) 표석

    ▼ 중학당 터(中學堂址) 표석... 더트윈타워 앞 모퉁이에 위치<다음 로드뷰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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