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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풍수답사(박익경, 함평이씨시조묘,양송천,기대승,민씨할머니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5. 6. 5. 09:00
풍수답사를 다녀와서 제대로 된 답사기를 써야지 하고 마음만 먹었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 보니 답사는 계속하는데
블로그에 답사기가 올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양식을 대폭 생략하고 단순히 사진 위주로 답사기를 올리려고 한다.
그래서 신속하게 답사기를 올리려고 한다. 5월말에 답사를 다녀온 무안, 광주시, 장성지역 묘역 답사를 다녀왔다.
애한정 박익경, 함평이씨시조묘, 양송천 묘, 월봉서원과 기대승 묘 울산김씨 발복처 민씨할머니묘를 올린다.
박익경(朴益卿)
1438년(세종 50)∼1520년(중종 15). 조선 전기 문신. 자는 필보(弼甫)이고, 호는 애한정(愛閑亭)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무안 고절리(高節里)에 터를 잡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무안파의 입향조이다.
증조부는 박강(朴綱)이며, 조부는 단양군수(丹陽郡守) 박형(朴亨)이고, 부친은 평강현령(平康縣令) 박이(朴頤)이다. 처부는 광산이씨(光山李氏) 이시조(李時措)이다. 박임경(朴臨卿)의 아우이다.
단종(端宗) 때 효행으로 정릉참봉(定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단종복위(端宗復位) 사건으로 벼슬에 물러나 무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무안 병산서원(柄山書院)에 배향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 무안박씨 애한정 박익경 묘... 와우형이라 전한다.
▼ 무안박씨 무안파조 묘역
▼ 무안박씨 애한정 박익경 묘 전경
▼ 무안박씨 애한정 박익경 묘
▼ 무안박씨 애한정 박익경 묘 후경
▼ 무안박씨 애한정 박익경 묘에서 회원 중 한 명이 기를 받고 있다.
▼ 무안박씨 묘역 인근에 있는 양파... 숫양파라고 하는데 양파에도 암,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함평이씨(咸平李氏)
함평(咸平)은 전라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함풍과 모평 2현의 합명이다. 함풍현은 본래 백제의 굴내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함풍현으로 고쳤고, 모평현은 다지현을 다기현으로 개칭하고 고려 태조때 모평현으로 하였다. 그후 1409년 함풍현과 모평현을 병합하여 함평으로 개칭되었다.
함평이씨(咸平李氏)는 고려 광종때 신호위 대장군을 지내고 함풍군에 봉해진 이언(李彦)을 시조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서 언(彦)의 10대손인 종생(從生)이 세조때의 무장으로서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오르고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는데 함평 이씨의 뛰어난 인물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다.
문신으로는 우윤 관(瓘)의 아들로 선조때 대사간을 지낸 효원(效元),동지 겸 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함릉부원군에 진봉되고 공조판서를 역임한 해,선조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춘원(春元), 효종때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낸 지익(之翼),인조때 황해도 관찰사 배원(培元) 등이 명망높은 충절의 가문을 빛냈다.
무장(武將)으로는 통제사를 지낸 원(沅), 영조때 훈련대장, 병조판서, 분무공신을 역임한 삼(森),정조때 어영대장, 도총관을 지낸 창운(昌運) 등이 함평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함평이씨 종친회에서 발췌>
▼ 함평이씨 시조 묘 앞에 새워진 어마어마하게 큰 발상지 비석...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 추측컨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씨 시조묘는 대부분 유,돌로 이뤄줘 있다. 그만큼 권위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곳 시조묘는 평지룡에 지혈로 입지되어 후손들의 권위와는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마도 후손들이 이렇게 높게 발상지비를 세우지 않았을까....?
▼ 함평이씨 시조 묘
▼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 묘
▼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 묘... 특이하게 향로석에 불교 표식이 보인다.
▼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 묘 석물...
▼ 함평이씨 시조 묘 백호방향...
▼ 함평이씨 시조 묘 청룡방향...
▼ 함평이씨 시조 묘 후경..
▼ 함평이씨 시조 묘 앞에서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답사객 단체사진...
양응정(梁應鼎)
1519(중종 14)∼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담(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하(以河)이고, 아버지는 교리 팽손(彭孫)이며, 어머니는 금산김씨(錦山金氏)로 화(話)의 딸이다. 동래부사 응태(應台)의 아우이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양만용(梁曼容)
1598(선조 31)∼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長卿), 호는 오재(梧齋). 공조참판 응정(應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팽손(彭孫)이고, 아버지는 산축(山軸)이며, 어머니는 장흥고씨(長興高氏)로 예조좌랑 종후(從厚)의 딸이다.
강항(姜沆)·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장원하고, 이 해 증광문과에 을과고 급제한 뒤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예문관검열·예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검열로 있을 때 직언으로 인하여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비위에 거슬려 승진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군수·현감 등 외직과 수찬(修撰)·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제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오재집』 2책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역 안내판...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역... 왼쪽이 현무봉이고... 우측이 신도비...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역 전경...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역 석물...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 후경... 앞쪽이 안산인데 기룡혈은 내팔거팔이 되어야 하는데 아쉽다...
▼ 송천 양응정(梁應鼎) 묘역 뒤쪽으로 증손자 양만용(梁曼容)의 묘가 있다.
▼ 한림학사 양만용(梁曼容) 묘비
▼ 한림학사 양만용(梁曼容) 묘 후경... 양송천 묘 보다 훨씬 낫다.
월봉서원(月峯書院)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서원.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73년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사우(祠宇)를 비롯하여 충신당(忠信堂)·존성재(存省齋)·명성재(明誠齋)·유영루(遊泳樓)·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뒤 전라남도유림에 의하여 1938년 5칸의 빙월당(氷月堂)이 건립되었으며, 1972년에 4칸의 고직사(庫直舍), 1978년에 외삼문(外三門)과 3칸의 장판각(藏板閣), 1980년에 사우(祠宇), 1981년에 내삼문이 건립되었다.
빙월당은 광주광역시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고봉집(高峯集)』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3만6000평과 임야 87정보 등이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기대승(奇大升) 묘, 월봉서원(月峯書院) 입구에 있는 칠송정...
▼ 월봉서원(月峯書院) 입구의 마을 담장...
▼ 기대승(奇大升)을 모신 월봉서원(月峯書院) 원경...
▼ 월봉서원(月峯書院) 빙월당(氷月堂) 전경
▼ 월봉서원(月峯書院) 편액...
기대승(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1549년(명종 4)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왕복서(往復書)』·『이기왕복서』·『주자문록(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기대승(奇大升) 묘 원경
▼ 기대승(奇大升) 묘표
▼ 고봉 기대승(奇大升) 묘비
▼ 기대승(奇大升) 묘 석물...
▼ 기대승(奇大升) 묘 청룡쪽 석물
▼ 기대승(奇大升) 묘 후경... 앞쪽 조산의 모양이 구룡을 닮았다하여 구룡산이라 한다.
울산김씨(蔚山金氏) 민씨할머니(麗興閔氏)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명정리에 위치한 울산김씨의 중시조비(中始祖妣) 여흥민씨(麗興閔氏)의 묘소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물론, 풍수지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복부혈의 명당 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여흥민씨(1350-1421)는 아호(雅號)가 하소부인(荷沼夫人)으로 한성판윤 량(亮)의 따님이며 태종비 원경왕후 민비와 사촌이다. 그녀는 울산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 신라 경순왕의 둘째왕자)의 17세손인 김온(金穩)과 혼인하여 달근, 달원, 달지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아들인 달원의 현손이 바로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쳐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된 18명의 인물 중 한명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1510-1560)이다. 이들 해동18현 중 호남출신은 유일하게 하서선생뿐으로 바로 장성 출신이다.
그리고 남편 김온(1348-1413)은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의 요동정벌과 조선개국에 참여하였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태조원년에는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부사를 거쳐 양주목사를 지냈으며 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어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호는 학천(鶴川)으로 학천군 또는 흥려군(興麗君)으로 불리며 현재 울산김씨의 중시조로 삼고 있는 인물이다.
울산김씨 문중에서는 울산김씨가 하서선생 및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하서선생을 배출한 장성뿐 아니라 호남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하서선생의 5대조 할머니인 하소부인이 영세흥왕(永世興旺)의 터에 묻힌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터를 하소부인 자신이 직접 신후지지로 잡았다고 한다.
그녀의 해박한 풍수지식은 한양의 궁성 터를 잡고 축조에 참여한 무학대사가 업무상 자주 한성판윤댁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무학대사로부터 풍수지리서나 교육 등을 통하여 풍수이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풍수이론을 정립한 <<하소결(荷沼訣)>>은 울산김씨의 문화유산으로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발췌>▼ 명정재와 여흥민씨할머니에 대한 안내문
▼ 여흥민씨할머니 묘 3D 위성사진
▼ 여흥민씨할머니 묘 3D 위성사진... 돌혈이 뚜렷하다.
▼ 여흥민씨할머니 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솥을 엎어놓은듯 하다하여 복부혈이라 한다.
▼ 여흥민씨할머니 묘 전경
▼ 여흥민씨할머니 묘에서 바라본 속기처...
▼ 여흥민씨할머니 묘 앞에서 바라본 명당... 앞쪽으로 KTX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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