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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아홉 정승이 뭍힌 구정승골 답사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7. 7. 18. 00:49
양평 구정승골 답사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석초 채영석 회장님과 이기풍수전문가반 회원님들이 함께 구정승골을 찾았다. 장마철이라 날씨에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주말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예보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비는 내리지 않고 오히려 햇빛을 가려주어 시원스런 날씨 속에 좋은 답사를 할 수 있었다.
구정승골은 아홉명의 정승이 뭍혀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사실인즉 9라는 숫자는 꼭 아홉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많다는 뜻으로 이해하는게 여러모로 편리한 것이다. 그러니 구정승골 또한 아홉명의 정승이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여러명의 정승이 뭍힐만한 곳이다 라고 보는게 좋다.
이곳은 김사형의 묘가 제일 처음 들어와서 이후로 동고 이준경, 한음 이덕형 등으로 정승들 묘가 들어서면서 구정승골의 이미지가 굳어진듯 하다. 그만큼 산세가 뛰어나고 국세가 잘 짜여 있다고 보면 된다. 이중 으뜸으로 꼽는 묘가 바로 동고 이준경 선생 묘이다.
풍수하는 사람들은 이곳 구정승골을 반드시 들르면서 이론을 복습하고 묘 조성 당시의 형기, 이기 이론들을 터득해 보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 이번 간산은 이기풍수전문가반 회원님들과 함께하면서 패철의 활용법, 88향법의 적용 등을 연구하였는데 실은 이 묘들이 조성될 당시에는 88향법 보다는 정음정양법으로 조성했을 것인데 학습차원에서 공부했다고 보면 된다.
구정승골
광주이씨는 광릉부원군(諱 克培)과 동고(諱 浚慶), 한음(諱 德馨)등 세분의 영의정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조선왕조의 명 재상으로 손 꼽히는 동고상공과 한음상공의 유택이 있는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와 부용리 일대를 사람들은 구정승골이라고 부른다.
고려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여러분의 정승(증직 포함)이 이곳에 유택을 정했는데 최초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분은 안동김씨 익원공(翼元公)파 파조인 김사형(金士衡1333~1407;좌의정)이고, 김사형의 사위 평산신씨 제정공파(齊靖公派) 파조 신효창(申孝昌1364-1440;좌의정증직), 신효창의 후손인 申承演의 외손 광주이씨 東皐 이준경(1499 -1572;영의정), 그리고 이준경의 인척인 漢陰 이덕형(1561-1613;영의정)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그 분들의 부친까지 증직을 받아 결국 다섯분의 광주이씨 정승을 포함, 민희(閔熙1614 ~ 1687;좌의정), 민암(閔暗1636~1694;우의정) 형제와 정창손(鄭昌孫1402~ 14 87;영의정)까지 모두 열분의 정승묘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이씨로는 동고, 한음 두 분 상공과 그들의 부친 수찬공(守貞;1477-1504 贈 領議政), 지사공(民聖;1539-1618 贈 領議政) 그리고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판서공(宜翼;1794-1883 漢陰의 9대 종손,正一品 輔國崇祿大夫)의 부친 현감공(宗億 1776 -1821 贈 右議政)등 다섯 분이시다.
그러나 구정승에 포함된다는 정창손 묘는 1970년대에 서울 방이동에서, 민희 묘는 1984년에 서종면 노루고개에서 이장한 것이고 민암 묘가 있는 부용리 화개산은 구정승골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음므로 구정승이란 아홉 정승을 뜻한다기 보다는 신효창이 장인 묘를 쓰면서 명당 자리가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구정승골이라는 말이 생겼고 후에 그가 말한 명당 자리에 정승을 지낸 분들이 묘를 계속 써 온 결과 오늘날의 구정승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부터 양서면 부용리와 목왕리 일대는 골짜기에 따라 팔정승골, 구정곡(九政谷), 구정승골, 구정골, 구정벼랑, 구정베루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려 왔다.
<다음카페 동고가문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비지정
문화재명칭
구정승골(이준경묘, 이덕형묘, 김사형묘)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목왕리 일대
관리자(연락처)
▼ 구정승골 답사에 참가한 석초 회장님과 회원님들...
이준경(李浚慶, 1499년 ~ 1572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하성군 이균(河城君 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 십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구정승골 입구에 위치한 동고 이준경 선생 행적 안내판...
▼ 이준경선생 묘 문화재 안내판...
▼ 이준경선생 묘 전경...
▼ 이준경선생 묘 문인석과 조안산... 최근에 묘역을 조성하면서 세운 문인석인데 중국 냄새가 많이 난다.
▼ 이준경선생 묘 국세와 명당... 꽉여져진 국세는 교과서적이다. 형기적으로 잘 갖춰진 곳은 이기적으로도 잘 맞게 된다고 석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비록 그 당시 이기적으로 향법에 맞게 조성하진 않았지만 법수에 다 맞게 되어진다는 말씀이시다.
▼ 이준경선생 묘 현장에서 열강이신 석초 회장님...
이덕형(李德馨,1561~1613)
조선의 문신.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약관 20세에 급제한 이후 많은 관직을 거쳐 31세에 대제학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을 모시고 명나라와 일본의 사신을 접견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민심을 수습한 후 영의정에 올랐다.
1561년 한성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어머니 유씨(柳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다. 외가가 있는 경기도 포천에서 문재가 뛰어났던 양사언(楊士彦)·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교류했다. 민간에서는 어린 시절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이덕형이 이항복을 만난 것은 1580년의 문과 별시에 급제했을 때라고 전한다.
1580년(선조 13)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1583년 사가독서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591년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했다. 1595년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이 되었다.
1606년 영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박응서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저서에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 한음 이덕형선생 사당 입구...
▼ 한음 이덕형 묘 측경... 비가 내리다 멈춘 상태라 푹푹 찌는 날씨였는데 이곳은 인혈로 오르는데 땀 좀 흘린다.
▼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문화재 안내판...
▼ 한음 이덕형 묘 전경...
▼ 한음 이덕형 묘 후경... 향은 앞쪽 청룡자락에 맞춰져 있다.
▼ 패철도를 펼쳐놓고 열강 중이신 회장님...
▼ 한음 묘에서 회원님들...
▼ 사실 한음선생 묘는 본래의 향선을 최근에 청룡쪽을 틀어서 조정했다. 2000년대 초에 왔을 때는 수구쪽 직거수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향선이 백호방으로 틀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석물은 그대로 놔둔체 장대석과 상석만 튼 흔적이 보인다.
▼ 전체적인 향선을 청룡쪽으로 틀어 놓은 흔적이다.
▼ 원래의 향선은 앞쪽 직거수를 향하면서 멀리 운길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후에 정확한 향선을 측정해서 올리겠다.
▼ 한음 이덕형 선생 묘 윗쪽에는 선생보다 5년 늦게 돌아가신 부친 이민성 묘가 있다.
▼ 한음선생 묘역에서 향선에 대해 설명하시는 석초 회장님...
김사형(金士衡,1341~140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김방경(金方慶)이고, 할아버지는 김영후(金永煦)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김천(金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년(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정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 구신이며, 가문이 귀하고 높았으며 마음이 청고해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결단하였다. 대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구정승골에 맨 처음 들어온 김사형선생 사당...
▼ 김사형선생 사당 앞에서 묘역에 대해 설명...
▼ 입산시 간수구(入山時 看水口)하라...
▼ 김사형선생 묘 전경... 이곳 묘는 사위인 신효창선생이 잡은 곳이다. 신효창 선생은 당대의 풍수대가로 알려져 있다.
▼ 이곳 묘역은 괘등혈(掛燈穴)로 알려져 있다.
▼ 김사형선생 묘갈...
▼ 묘역 앞에 새로 세운 신묘갈...
▼ 김사형선생 묘역 문화재 안내판...
▼ 이번 간산은 이기풍수 패철과 향법을 공부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비록 88향법과 무관하게 조성된 묘역이지만 향법으로 학습을 진행했다. 특히 정음정양법에 맞춰 조성했는지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 석초 회장님과 함께 저도 인증샷...ㅎ
▼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걱정했던 비가 오지않아 매우 만족스런 간산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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