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진천]송강(松江) 정철(鄭澈)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8. 3. 12. 20:54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송강 정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고등학교 때 관동별곡을 안읽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던 글이다보니 송강은 대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역사를 공부하다 어느날 당파의 영수라고 TV연속극에서 나오면서 새삼 놀란적도 있었다.
풍수문화답사를 하면서 송강 유적지를 여러군데 돌아다녔는데 대표적인 곳이 이곳 진천의 정송강사, 송강 묘소이다. 이곳은 묘소가 높은 곳에 있다보니 접근이 어려워 풍수단체답사로만 두번 왔었는데 이번에도 진천지역 풍수답사를 따라오게 되었다.
이곳은 용맥이 길게 이어져 내려오는 일명 과룡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여러 풍수인들이 혈이 아니라고 말한다. 맥이 이어져 내려오다 혈을 맺을 때는 분명한 증적을 남겨야 하는데 이곳은 역사(逆砂)가 없고 영사(迎砂)가 없으니 그냥 지나가버리는 곳이다.
또한 혈을 맺는 곳에서는 본인 주인이 되어 똑바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곳처럼 끝을 틀어버리는 곳은 혈을 맺지못한다. 기룡혈이 되려면 영사와 더불어 안산이 명확해야 하는데 그 또한 없어서 여러모로 볼 때 미흡한 건 사실이다. 이 터는 우암 송시열이 소점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산세를 고려한다해도 조금 의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정송강사가 위쪽에 있는데 단체로 가면 묘 외에 다른 곳은 거의 못가게 된다. 이번에 보니 묘 오르는 곳에 어은계석이라고 안내판이 새로 생겼던데 송강사 계곡의 돌이 아름답다고 붙여놓은 것 같다. 그런데 돌이 일반 하천 돌보다 나은게 전혀 아니던데...ㅎ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정유침(鄭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정자(鄭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이때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년(명종 7)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유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星山: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해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
문화재명칭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및 신도비
소재지
충북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
관리자(연락처)
진천군청, 정송강사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전경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입구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입구 계곡을 상산8경 어은계석이라 하여 계곡의 돌을 8경으로 지정했다. 여느 계곡의 돌과 별반 다를바 없는데 뭘 보고 지정했는지 의아스럽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안내판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역 전경... 앞쪽에 보이는 묘는 아들 정종명 묘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전경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비... 비신과 덮개돌이 하나로 되어있다. 돌의 재질이 좋지 못해 작은 글자들은 판독이 어렵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석물들은 자그마하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는 좁은 맥선상에 위치해 있고, 맥이 머물지 못하고 흘러가는 과룡지에 점혈하여 좋은 기운을 얻기 어렵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아래에는 둘째아들 정종명 묘가 있다.
▼둘째아들 정종명 묘비
▼둘째아들 정종명 묘 석물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입구 모습... 송강사가 윗쪽으로 있고 묘는 왼쪽 능선상에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입구의 노거수...
▼송강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송강(松江) 정철(鄭澈) 신도비각
▼송강(松江) 정철(鄭澈) 신도비 안내판
▼송강(松江) 정철(鄭澈) 신도비... 귀부 모습이 특이하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묘 입구에 있는 관동별곡 시비...
◐야초 실용풍수지리학회 강의 일정 안내
강의 개설 장소
강좌명
강의 시간
강의 기간
수강신청 기간
수강신청 연락처
수강신청바로가기
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실용풍수지리
매주 목요일
10시~13시
16주
(1년과정)
매년 학기 전
(2월,8월)
02- 3668-9890,
9871 ~ 2
성북문화원
웰빙실용풍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8시30분
12주
매분기(2월,
5월,8월,11월)
02- 765-1611
월곡1동 주민센타
웰빙생활풍수
기초과정
매주 수요일
10시~12시
12주
매분기(3월,
6월,9월,12월)
02- 2241-5564
성북평생학습관
복을 부르는
생활풍수
매주 목요일
14시~16시
12주
매년 반기 전
(2월,8월)
02-2241-2420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 유성]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의 묘 (0) 2018.03.19 [충북 진천]좌의정 남지(南智) 묘(영의정 남재(南在) 손자) (0) 2018.03.13 (대전 서구)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송광식(송준길 아들) 묘 (0) 2018.03.05 (세종시)전의이씨 시조 묘 (0) 2018.02.22 (경기 가평)영흥부원군 효간공(永興府院君 孝簡公) 김조근 묘 (0) 2018.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