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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여주]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카테고리 없음 2020. 5. 16. 14:43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오래 전에 답사를 한 묘역인데 그동안 임시저장으로 묵혀 놓았다가 이제 꺼내 올리려니 기억이 거의 없다. 일단 사진 위주로 자료를 보고 정리해서 올리니 이해 바랍니다. 여주지역 묘지답사를 할 때 한꺼번에 한 묘역인데 이 묘는 성남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묘다 보니 풍수적으로 특별한 것이 없어 그냥 묵혀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가 소용돌이 치던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무사하게 천수를 누린 것 만으로도 처세가 분명했다고 여겨진다. 신도비가 문화재인데 문이 잠겨 있어서 신도비는 못 보고 묘만 보고 왔다.

     

    정대년(鄭大年)

     

    본관은 동래(東萊). 할아버지는 사직(司直) 정형운(鄭亨耘)이고,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전(鄭荃)이다. 어머니는 거창 신씨(居昌愼氏)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묘서령(宗廟署令)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아들은 여산 군수 정휴복(鄭休復)이며, 손자는 정호(鄭灝), 증손자는 정양우(鄭良佑)와 충청도 관찰사 정양필(鄭良弼)이다.

    정대년(鄭大年)[1503~1578]은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예빈시 주부를 거쳐 1535년(중종 30) 지평, 장령, 부교리, 집의,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1542년(중종 37)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4년(인종 즉위년) 승정원 도승지, 1546년(명종 1)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1547년(명종 2) 첨지중추부사, 형조 참의, 1549년(명종 4) 병조 참의, 1551년(명종 6) 공조 참의, 이듬해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우윤, 1553년(명종 8) 경기도 관찰사, 1555년(명종 10) 호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 대호군을 거쳐 1556년(명종 11) 광주 목사로 나갔다.

    1557년(명종 12) 한성부 좌윤·한성부 우윤·한성부 좌윤, 1561년(명종 16) 상호군, 1566년(명종 21) 사헌부 대사헌, 1567년(명종 22) 형조 참판, 같은 해 선조 즉위 후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568년 호조 판서, 1572년(선조 5) 우찬성, 우의정이 되고 1575년(선조 8)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3년 뒤인 15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대년은 유능한 관료에 청백리였다. 선조 재위 초 육조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모든 관료가 정대년을 추천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정대년은 단정한 외관에 성품이 너그럽고 생활이 검소하였으며 직무에 충실하였다. 또한 지혜롭고 식견이 뛰어나 어렵고 번거로운 업무도 척척 해냈다.

    정대년은 네 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오래도록 벼슬을 하였으나 세력을 잡은 권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을 하거나 빌붙은 적이 없었다. 두 번의 이조판서를 지내면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이름난 정승]으로 불리었다. 임금이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첩을 정부인(正夫人)으로 삼게 된 연유를 밝히라고 명하여 이를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뇌물을 쓰자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정대년이 보복을 당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정대년의 무덤은 경기도 성남시에 있었으나 1986년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오미마을 동래 정씨 세장지로 옮겼다. 선조 대의 명필인 김현성(金玄成)이 묘갈을 썼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13년에 양주목사를 지낸 정대년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이 정대년 추모비는 다른 양주목사 송덕비들과 함께 세워져 있다. 동래 정씨 사암공파 묘역 아래 혁림사(赫臨祠) 경내 비각에는 1640년(인조 18)에 세워진 정대년 신도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48호]가 있다. 이 신도비는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비문을 받아 세우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가 증손자인 정양우, 정양필 형제가 병조 참판 오준(吳竣)의 글씨와 홍문관 부제학 김광현(金光炫)이 쓴 두전(頭篆)을 받아 세웠다. 비의 뒷면에는 이러한 건립 배경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기록한 추기가 있다. 추기는 증손자 정양필이 적고, 예조 정랑 유시영(柳時英)이 글씨를 썼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 인용>

     

    정대년 신도비(鄭大年 神道碑)

     

    정대년 신도비(鄭大年 神道碑)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신도비이다. 1993년 6월 3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암 정대년(1507∼1578)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대년은 중종 27년(153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 11년(1578)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에는 영지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부인의 집안과 성품, 자손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한 것을, 뒤에 병조참판 오준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의 정 3품 벼슬) 김광현이 쓴 비명칭을 받아서 증손인 양우·양필 형제가 세웠다. 비 뒷면에는 이러한 사실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충청도관찰사 정양필이 적어, 예조정랑(예조의 정 5품 벼슬) 유시영이 글씨를 썼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48호

    문화재명칭

    정대년 신도비(鄭大年 神道碑)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205-3

    관리자(연락처)

    동래정씨사암공파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소 입구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가 있는 동래정씨 세장지 공임사(恭臨祠)

     

     ▼ 공임사(恭臨祠) 전경

     

     ▼ 입구에 정 충정공(忠貞公) 비가 새로 세워져 있는데... 신도비는 안쪽에 있는데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 정대년(鄭大年) 신도비 안내문

     

     ▼ 문이 굳게 잠겨 있다.

     

     ▼ 담 너머로 들여다보고... 

     

     ▼ 멀리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역을 바라본다.

     

     ▼ 이날 묘역이 넓어서 정대년(鄭大年) 묘역만 보고 왔다.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표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석물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장명등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후경... 이장해 온 묘역인데 좋은 자리를 점한 것으로 보인다.

     

     

     

     

     

     ▼ 충정공(忠貞公) 정대년(鄭大年) 묘 윗쪽에 있는 부친 정전 묘

     

     ▼ 정대년(鄭大年) 부친 정전 묘

     

    ▼ 정대년(鄭大年) 부친 정전 묘표 

     

     ▼ 정대년(鄭大年) 부친 정전 묘비

     

     ▼ 정대년(鄭大年) 부친 정전 묘비 후면

     

     ▼ 정대년(鄭大年) 조부 정형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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