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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마포]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카테고리 없음 2020. 5. 18. 09:00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오래전에 양화진, , 외국인 묘역, 절두산 성지 등을 답사해 놓고 글을 쓰지 못했는데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나와서 이제라도 사진을 올린다. 거의 7년이 지난 사진이다.

    그날의 감회는 잊혀졌지만 절두산 성지를 방문하고 많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양화진 나루터 표석이 성지 아래에 있어서 이곳을 가려면 반드시 성지를 거쳐야 하는데 나는 목적지가 양화진 나루터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 절두산 성지가 목적지가 된다. 그러니 같은 곳을 가더라도 사람들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이곳에 가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고 고개가 숙여지는 곳이다. 이땅에 참 많은 희생 뒤에 종교가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종교의 자유라는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즈음 코로나 시국에 종교집회로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라 이런 종교도 때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이러니 정답은 없고 전부 소설만 쓰고 있는 것이다.....ㅎ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한강변 최고의 절경으로 유명하며 봉우리의 모양에 따라 가을두·용두봉·잠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진까지 진격해온 적이 있었는데, 이에 흥선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의 물을 서학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으며 이와 함께 수많은 교인들을 붙잡아 양화진 근처의 이 산봉우리에서 목을 잘랐다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절두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은 이의송(李義松)으로 1866년 10월 22일 부인·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헤아려 천주교측에서는 약 1만 명가량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특히 선참후계라 하여 심문과정 없이 바로 처형했기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하며 이때문에 처형당한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잘린 목은 그대로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고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66년 순교자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기념관은 성당·박물관·경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양화진에는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국선교에 헌신했던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외인묘지가 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소재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

    관리자(연락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잠두봉으로 알려지던 곳이 지금은 절두산 성지로 굳어졌다.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바로 옆으로 지하철 2호선 철교가 지나간다.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를 간 목적은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 나루터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 옆에 있던 영혼의 강 시비...

     ▼ 한강변에서 올려다 본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에는 많은 전시품, 조각품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성 남종삼 요한 흉상...  남종삼(南鍾三)[1817~1866]은 1838년(헌종 4)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다. 스스로 서학서(西學書)를 읽고 입교하여 베르뇌(Berneux) 주교를 자기 집에 숨겨 주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고종 초기 베르뇌와 다블뤼(Daveluy) 등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남종삼은 이때 고양군 잔버들마을에서 체포되어 양력 3월 7일 참수형을 당하였다. 시신은 참수된 후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 이후 1909년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시복을 계기로 현재 절두산성당 지하에 옮겨 안치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남상교 청덕비... 남상교(南尙敎)는 늦은 나이인 55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이 현풍현감(玄風縣監)·충주목사를 거쳐 1865년(고종 2)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받았다.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 동생 남탄교(南坦敎)의 아들 남종삼(南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켰고,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남종삼은 새남터에서, 남상교는 공주 진영(鎭營)의 옥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풍현감(1837년 12월∼1840년 12월)을 지냈을 당시, 일가족이 현풍에 3년 동안 살았는데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그 덕을 기려 청덕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현풍 사무소에 있다가 1974년 5월 27일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박순집 공덕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은언군 · 송 마리아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 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 야외전시장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 김대건 신부 동상... 성 김대건 신부의 성화를 의뢰하면서 고증 작업이 시작되었고, 과학적으로 실측 조사한 수치와 균형에 의하여 김대건 신부의 성화가 그려지게 되었다.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 오성 바위와 문지방 돌...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 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 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 형구돌...병인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발굴되어 1974년에 이전해 왔다. 이 형구돌은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땅 속에 묻혔던 것을 발굴 해 낸 것으로,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였다. 그밖에 순교자들을 고문했던 형구들은 성당 앞 형구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둘레 3m, 두께 30cm, 앞 구멍 지름 30cm, 뒷구멍지름 6cm.<네비버블로그 봄여름가을겨울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에서 발췌>

     ▼ 절두산 성지(切頭山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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