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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김일진(숙종 국구 김주신부친)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5. 26. 14:30

     

    숙종 국구 김주신 가족 묘

     

    일찍이 고양 대자리에 있는 숙종 국구 김주신 묘를 다녀오면서 함께 있는 김주신 가족 묘를 올릴 요량으로 포스팅을 해놓았는데 잊고 지내다 이제야 찾아 올린다. 이곳에는 김주신 부친 김일진, 형 김성신, 후손들 묘들이 모여 있다. 이들 중 좌의정 김사목 묘도 함께 있다.

     

    경주김씨 김일진(숙종 국구 김주신 부친)

     

    부친은 예조판서를 지낸 정효공 야당 김남중, 조부는 김수겸, 증조부는 퇴계의 문인으로 좌의정을 지낸 충익공 주은 김명원이다. 어머니는 창녕성씨 생원 성순의 딸이고, 부인은 풍양조씨로 좌의정을 지낸 문효공 포저 조익의 손녀이며, 진사 조래양의 딸이다. 아들은 진사 김성신과 경은부원군 효간공 수곡 김주신이고, 김주신의 딸이 숙종의 두번째 계비인 인원왕후이다.
    22세(1654년)에 생원시 합격하였으나 특별한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33세(1665년)에 조금 이른 죽음을 맞았다.
    그는 일찍 죽었지만 부인 풍양조씨는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쳐 명문가의 선비로 키웠으며,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 할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
    그의 후손들중 2품이상의 관직을 한 이만 열거해도 경은부원군 김주신, 공조판서 김효대, 좌의정 김사목, 좌참찬 김정립, 대제학 김창희, 이조참판 김영작, 예조판서 김정집, 공조참판 김철희,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며 총리대신인 김홍집 등 많은 이가 그의 직계 후손들이다. 같은 기간 노론에 속한 가문들을 제외하면 소론 중에선 김일진의 후손들이 높은 벼슬에 가장 많이 나가지 않았나 할 정도로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에는 김교신과 김교헌은 민족종교인 대종교 대주교로 있으면서 민족 의식을 강화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근대의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래원 김교집 역시 그의 후손이다.
    <다음블로그 숨겨진 역사이야기, 명문명가이야기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김일진 묘 외(김성신, 김상연, 김후연, 김효대, 김사목)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6

    관리자(연락처)

    경주김씨의정공파

     

    ▼ 김주신 부친 김일진 묘와 후손 묘 위치<네이버블로그 개미실사랑방에서 옮겨옴>

    ▼ 김주신 부친 김일진 신 묘비

     

    ▼ 김주신 부친 김일진 구 묘비

     

     

    ▼ 김주신 부친 김일진 묘 후경

     

    ▼ 김주신 형 김성신 묘

    ▼ 김주신 형 김성신 묘비

     

     

     

     

    ▼ 김주신 형 김성신 묘 후경

     

    ▼ 김주신 형 김성신의 장자 김상연 묘

    ▼ 김주신 조카 김상연 묘비

     

     

    ▼ 김주신 장자 김후연 묘

     

    ▼ 김주신 장자 김후연 묘 전경

    ▼ 김주신 장자 김후연 묘 후경

     

    ▼ 김주신 손자 형조판서 김효대 묘

     

    ▼ 김주신 손자 형조판서 김효대 묘비

     

    ▼ 김주신 손자 형조판서 김효대 묘 장명등

     

    ▼ 김주신 손자 형조판서 김효대 묘 후경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 도총관(都摠管) 김주신(金柱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후연(金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김효대(金孝大)이며, 어머니는 정지익(鄭志翼)의 딸이다. 평안도관찰사 김정집(金鼎集)이 손자이다.
    음보(蔭補)로 전랑(殿郎)에 제수되었으나, 그 뒤 여러 차례 특지(特旨)로 김제군수가 되었다.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부교리(副校理)·보덕(輔德)·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774년 승지가 되었다.
    1783년(정조 7)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영조의 즉위에 환갑을 맞아 경은가(慶恩家)로 인정받아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784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785년에 대사헌·총융사를 지낸 뒤, 이듬해 9월 형조참판이 되어 상왕대비의 호를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1788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우택(雨澤: 비로 인한 혜택)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다. 1789년 다시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고, 1790년 형조판서·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지냈다.
    같은 해 경기도관찰사로 재직시 도사(都事) 송익효(宋翼孝)가 조그만 잘못을 저지른 서리에게 곤장을 치는 남형을 행사하자, 왕에게 장계를 올려 파직시켰다. 한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우수사 세 번, 경기감사 일곱 번, 총융사를 다섯 번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병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1808년(순조 8) 우의정, 1819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1828년에는 영중추부사 겸 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천부적인 자질이 영민하고 성실해 낮은 관직이라도 성심껏 봉사하였다. 조정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제약(制約)과 법헌(法憲)을 스스로 준수해 임무를 다하였다. 또한, 경장(更張: 국가의 제도를 개혁함)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검약을 생활 신조로 삼았다.
    70년 동안 삼조(三朝: 영조·정조·순조)의 신하가 되어 원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으며, 회방(回榜: 登科回甲)을 맞아 궤장(几杖)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관직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왕이 언제나 자문을 구하였다.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는 교훈을 실천에 옮기면서 귀감으로 ‘無求室(무구실)’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액자로 걸어놓고 교훈으로 삼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김주신 증손자이며 형조판서 김효대의 아들 좌의정 김사목 묘

     

    ▼ 김주신 증손자 좌의정 김사목 묘비

    ▼ 김주신 증손자 좌의정 김사목 묘 측경

    ▼ 김주신 증손자 좌의정 김사목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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