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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구로]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7. 29. 10:00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영의정 류순정과 류홍 부자묘역은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다.

    입구쪽에 가파른 언덕에 있는 묘가 영의정 류순정 묘이고

    정면에 보이는 묘군 중 맨 윗쪽에 있는 묘가 류홍 묘다.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소재의 총 면적26,531㎡에 이르는 야산에는 중종반정 3대 공신 중의 한 명인 류순정(柳順汀)과 안동 권씨(安東 權氏) 부부 묘역, 그 아들 류홍(柳泓)묘역, 그리고 그 후손 5대(류사필 · 류준 · 류중광 · 류식 · 류순)의 묘 등 총 7대 8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류순정이 1512년(중종 7년) 53세에 졸(卒)하게 되자 중종이 박원종 졸시(卒時)의 예에 따라 철조삼일(輟朝三日)하고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내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과 온수동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작동에 이르는 약 300여 만평의 땅을 사여(賜與)하면서 조성되었다.
    류순정 · 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 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으로 조성시기도 16세기 전반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속한다.특히 중종반정의 1등 공신인 류순정의 묘역은 조성 당시 왕족에게만 내려주던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사여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 속에서 조성되어 공신 묘역의 조성 방식을 알게 하는 중요 자료이다.
    묘역 내 석물들 또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 수법과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대 조각사 연구에 의미 있는 자료가 되며, 문인석 등에 보이는 의복 등은 복식사 연구에 중요 자료가 된다. 또한 두 공신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놓은 신도비의 비문은 실록 등 문헌 기록을 보완하는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대에 해서체로 두각을나타낸 명필 송인(宋寅)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서예사적 중요 자료이기도 하다.
    류순정(안동권씨 묘역 포함)과 류홍의 묘역 및 묘역에 부착된 석물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상을 2004. 8. 20자 서울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했으며,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가 관리자로 지정되있다.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서울시기념물 22
       류순정·류홍부자묘역
       서울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산43-32
       서울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

     


     

     

     

     

     

     

     

     

     

     

     

     

     

    ▼ 진주류씨 류순정, 류홍 묘역

     

    유순정(柳順汀)


    1459년(세조 5)∼1512년(중종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지옹(智翁). 목사 양(壤)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와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을 제수받았다.
    그뒤 훈련원정으로서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적을 수색, 포획하는 데 힘썼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서 도원수 허종(許琮)의 막료가 된 뒤 평안도평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으로서 임사홍(任士洪)의 잔악함을 논박하고,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남용을 추궁하는 한편, 야인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으로서의 활솜씨로 특별히 부응교에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주목사로 나가 압록강 연안의 야인정벌 때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적정탐지에 큰 공을 세웠다. 아울러 군자확보와 성곽수축 등 군비강화에 힘썼다.
    1503년에는 공조참판으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에 연산군의 밤사냥이 불편함을 진언하였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당하였다.
    1506년 이조판서로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모의, 거사하여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하여, 폐지한 경연부활에 앞장섰다. 얼마 뒤 연산군 때에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고 역모를 꾸미자, 이를 처리한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다시 책록되었다.
    이듬해 평안도 인산(麟山)·강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자를 강화하였으며, 이어 좌의정이 되어 당시 경기도 인천·김포·통진 일대에 횡행한 강도를 박영문(朴永文)·유담년(柳聃年)을 포도대장으로 삼아 처리하게 하고 유민의 안집책(安集策)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하였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하여 삼포(三浦)의 난을 평정하고, 각 포의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하였다.
    이때 대간들로부터 식화(殖貨)의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군공을 치하받아 영의정에 올랐다.
    2개월 후 병사하자 시호가 무안(武安)으로 내렸으나 문정(文定)으로 고쳐졌고,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진주류씨 류순정, 류홍 묘역 안내판

     

    ▼ 영의정 류순정 묘역 .. 앞쪽이 부인 안동권씨 묘

     

    ▼ 류순정 묘... 부인묘와 상하분이 될 때에는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은 하나만 세우는 것이 기본인데

    이곳은 류순정 묘 앞에도 망주석은 별도로 세웠고, 동자석을 따로 세웠다.

     

    ▼ 류순정 묘 문인석

     

    ▼ 류순정 묘.. 뒷쪽에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이곳은 입수처로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다.

     묘 주인공이나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이나 모두 좋지않다.

     

    ▼ 류순정 묘비.. 장마철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덮었는데... 보기 흉하다..

     

    ▼ 류순정 묘 앞의 망주석과 동자석

     

    ▼ 류순정 묘 앞의 동자석... 조각이 아름답다.

     

    ▼ 류순정 묘 후경.. 앞산이 높기 때문에 묘의 위치도 높은 곳에 쓰게 된다.

     

    ▼ 류순정 신도비.. 너무 좁은 곳에 있어서 정면 사진을 찍을 수 조차도 없다. 아랫쪽으로 옮기는

       것도 좋을듯 싶다.


    유홍(柳泓)


    1483년(성종 14)∼1551년(명종 6). 조선 중기의 무신·반정공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연(子淵). 영의정 순정(順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1506년의 중종반정 당시 이를 주도한 아버지를 따라 반정군으로 활동,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사복시주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승진, 곧 공조정랑으로 전임되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 그 아버지가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가 되자 막료로서 도왔고, 난이 평정된 뒤 내자시(內資寺)와 군기시(軍器寺)의 첨정을 지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에 오르고, 이어 훈련원부정을 거쳐 제포첨사(薺浦僉使)로 나가서는 역대의 첨사들이 뇌물을 받고 도서(圖書)의 검사를 소홀히 함으로써 왜인이 왜관에 무시로 출입하던 폐습을 단호히 뿌리뽑는 한편, 왜선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로 조정에 들어가 오위장을 겸임하였고, 1519년 이후 원주와 정주의 목사를 거쳐 훈련원도정, 충청도의 병마사와 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사·전라도수군절도사·회령부사·북병사 등의 변경장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44년 진산군(晋山君)에 봉하여지고 부총관을 겸하였으며,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에는 금직제장(禁直諸將)의 한 사람으로서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고, 1547년 훈련원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무신이면서도 문인·유사(儒士)와 널리 교유하였으며, 청렴검소하여 공조정랑으로 있을 때에는 선임자들이 관청의 기명(器皿)을 함부로 사용하던 폐습을 완전히 근절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류홍 묘역... 앞쪽에는 후손들 묘...

     

    ▼ 류홍 묘... 맨 윗쪽에 위치해 있다.

     

    ▼ 류홍 묘 장명등.. 장명등 창을 새로 해넣었는데... 창모양을 특이하게 했다. 보물로 지정된

     박중손 묘 장명등을 따라한 것 같다.

     

    ▼ 류홍 묘 문인석

     

    ▼ 류홍 묘비

     

    ▼ 류홍 묘역

     

    ▼ 류홍 묘 후경...

     

    ▼ 류홍 묘역과 류순정 묘 사이에 있는 평창이씨 묘...(류순정 계배라는 사람도 있고 류홍 계배라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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