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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초 채영석선생 간산기]강진(康津) 풍수와 신학산하(神鶴山下)의 와혈(窩穴)을 점한 김향수 조상묘
    풍수이야기/풍수간산기 2011. 9. 5. 10:00

    강진(康津) 풍수와 신학산하(神鶴山下)의 와혈(窩穴)을 점한 김향수 조상묘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진 읍내의 여관에 숙소를 정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기가 바쁘게 곧바로 창문부터 열어본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곧 개일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마지막 뉴스시간에 접한 연유이다. 창밖에는 풍객(風客)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슬푸슬 빗방울을 뿌려댄다. 나는 곧 개일 것이라는 그 동안의 행로에 일말의 희망을 건 턱없는 믿음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하루종일 비와 싸우며, 풍수답사를 강행해야 했다.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남도답사 일번지' '청자골' 이란 닉네임이 붙은 강진(康津)은 동쪽으로는 장흥, 서쪽으로는 해남, 북쪽은 영암, 그리고 남쪽으론 바다를 두른 완도와 이웃해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고을이다.
    즉,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보호막을 치고, 남쪽으로는 문을 개방하여 내륙 깊숙이 바다를 불러들인 천혜의 '편안한 나루터' 인 셈이다.

    강진을 품안으로 아우르는 산세는, 호남정맥(湖南正脈)에서 땅끝기맥으로 갈라져 나온 장엄한 월출산(809m)이 북쪽에서 탁사(托砂)로 버티고 앉아 동서로 길게 팔을 내뻗어 강진 땅 전체를 감싸안는 형세를 이룬다.
    오른팔에 해당하는 서쪽 산줄기는 서기산(511m), 석문산(272m), 첨봉(354m), 덕룡산(433m), 주작산(475m)을 치올리고 남으로 행룡(行龍)하다가 해남의 두륜산(700m), 대둔산(673m), 달마산, 갈두산을 차례로 솟구치고는, 땅 끝 마을 앞에서 남해바다로 입수(入水)하는 용맥이다.
    또한 왼팔에 해당하는 동쪽 산줄기는 월출산에서 이어지는 수인산(561m)과 별락산(274m), 오봉산(394m)을 일으키고 화방산(406m)에서 연맥되는 줄기가 탐진강 가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는 긴 여정을 마감한다.
    이 큰 두 산줄기에서 파생된 우두봉(439m)과 비파산(403m), 만덕산(409m), 신학산(115m) 등이 강진고을을 품안으로 보듬는다. 이곳 읍내를 용호(龍虎)로 호종하는 양쪽 산줄기의 생김새를 비교해 보면, 둘 다 빼어난 자태들을 자랑하지만 그 생김새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기묘한 암릉(岩陵)이 병풍을 두르듯 몇 십리를 일렬로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대룡(大龍)의 갈기처럼 느껴지는 서쪽 백호(白虎)가 더 용맹스럽고 남성적이라면, 바위가 많지 않고, 높은 산 못지 않게 야트막한 산들이 갈 지자(之字)로 진행하는 동쪽 청룡(靑龍)이 되는 산능(山陵)은 부드러우면서도 여성적인 자태가 베어난다.
    또한 산의 높낮음이 크지 않고 일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쪽 능선이 직선적이고 귀족적이라면 동쪽은 곡선적이고 서민적이다.

    강진의 대표적 풍수형세는 읍을 중심으로 인물(貴)보다는 부(富)를 창출해낸다는 '와우형(臥牛形)' 이다. 즉, 배부른 황소가 한가하게 누워 되새김질을 하고있는 형국으로, 이것은 강진 땅 전체의 형세라기보다는 강진읍의 진산(鎭山)인 우두봉 일대를 놓고 볼 때 그렇다고 본다. 그러한 황소의 품안에 강진읍이 터를 대고 있는 것이다. 강진읍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로 우두봉을 등에 대고 탐진강과 함께 어머니의 자궁처럼 내륙 깊숙이 파고드는 탐진만을 앞으로 아우른다.
    또한 강진읍 일대는 실제로 이 와우형국을 따라 지명설정이나 공공기관 등이 터를 점한 곳이 허다하다. 강진읍의 입구인 와우형의 머리에 해당하는 주변은 예전부터 '쌔끝', 즉, '혀끝' 이라 불렀는데, 이 일대는 강진고등학교를 비롯하여 강진도립병원, 농촌지도소 등 주요 기관이 들어서 있다. 또 소의 콧등에 해당하는 자리는 강진군청과 경찰서가,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는 군립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소의 귀 부위에 해당하는 곳은'고덕 대승의 소리를 듣는 절' 이란 뜻을 담은 고성사(高聲寺)가 자리를 잡고있는데, 이 사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의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4년 간 머물면서 그의 큰아들과 함께 주역 등 학문을 닦던 곳이다. 또 소의 얼굴 부위인 영랑생가 터는 예전부터 3대 법관이 날 자리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또한 소의 귀밑 동네다 하여 '귀미테' 또는, '자라부리(金鼇沒泥形)' 라 불리는 부락은 명당의 기운을 받아 '삼천리호 자전거' 를 기반으로 국부(國富)가 된 김향수(전 아남그룹 회장, 작고)씨의 태생지이기도 하다. 또 소똥이 떨어진 자리인 군동면의 영포(백금포)는 일정시대 때, 이 일대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운반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는데, 이곳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며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처럼 소 부위 말고도 와우형과 관련한 지명도 많이 발견된다. 강진읍 앞 들판 가운데가 되는 초지(草旨)라는 옛 지명은 현재는 목리(牧里)라는 행정지명을 사용하는데,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초동(草洞)마을과 함께 소가 먹는 넓은 풀밭이란 뜻을 담고 있다. 또 지금의 해태유업이 들어선 자리를 '구싯골' 즉, 소의 '여물통' 이라 하였으며, 강진읍에서 도암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가 '쉬었다 가는 곳' 이라 하여 휴우치(休牛峙)라 불렀다. 이밖에도 다산초당 가는 샛길 고개를 '소가 일하는 곳' 이라 하여 논치(勞牛峙)라 불렀고, 탐진만 앞 바다의 섬은 소의 '멍에' 란 뜻을 담아 가우도(駕牛島, 소 멍에)라 한다. 예전부터 강진사람들은 '탐진현감의 명판결문' 에서 구전된 '생거칠량 사거보암(生居七良 死去寶岩)' 이라는 풍수구절을 자주 입에 오르내리며 살아왔다. 즉, "생전에는 칠량에서 살다가 죽으면 보암(강진읍과 경계인 도암면의 옛 이름)에 묻힌다" 란 뜻이다. 즉 생전(生前)에는 오곡과 어물이 풍성한 탐진만의 동쪽인 칠량에서 살고, 죽어서는 산세가 좋고 명당이 많은 탐진만의 서쪽 도암으로 가 묻히라 하였는데, 그만큼 풍수적인 삶과 함께 이상향을 꿈꾸며 살던 순박한 고을이다.

    오늘의 주 답사는 아남그룹 창업자인 고(故) 김향수 씨의 선조들이 잠든 우리나라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완벽한 교과서적인 와혈(窩穴)명당이다.
    그동안 우리 학회에서도 여러 차례 와혈 간산을 다녀왔지만 거의가 인위적(人爲的)으로 터를 꾸며 용사하였거나,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와혈처럼 보이는 묘역으로, 음룡으로 들어오는 내룡(來龍)에서부터 당판(堂坂), 전순(氈脣), 사격(砂格) 등을 제대로 갖춘 혈장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일부 지사들을 보면 오목한 지형의 당판이면 모두 와혈이라고 앵무새처럼 떠들어 되지만, 거의가 빗물이 모아지는 계곡이거나 산자락을 깎아 인작해 놓은 것이 태반이다.
    이곳은 10여 년 전에 본인의 선사(先師)와 동반답사를 했던 곳으로, 그 근황이 궁금하기도 하고, 특유의 역마살(驛馬殺)의 끼가 발동되어 속단속결로 짐을 챙겨 나선 것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와혈이란, 그 모습이 닭 둥우리, 또는 소쿠리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형상으로, 주역 사상(四象)의 태양(太陽)에 속한다. 즉, 일반적인 음양의 척도로만 본다면 오목한 음중(陰中)에 볼록한 양(陽)이 혈심(穴心)이 되기 때문에 양혈(陽穴)로 분류한 것이다.
    그 모양은 마치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하여 개구혈(開口穴)이라 하기도 하고, 손바닥을 위로 젖혀놓은 앙장형(仰掌形)의 모습이다 하여 장심혈(掌心穴)이라 하기도 한다. 주맥(主脈)은 음래양수(陰來陽受)로, 용맥은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들어와 오목한 와장(窩場)을 형성한다. 와혈은 도두(승금)가 분명해야 하고 선익사(蟬翼砂), 또는 용호(龍虎) 등이 팔을 뻗어 혈장을 품안으로 안는 듯한 형태를 이루면서, 전체적인 혈장의 형상은 오목한 중에 약간 돌출한 와중미돌(窩中微突)이 되어야 혈증(穴證)이 되고, 혈장이 낮기 때문에 심장(深葬)해야 한다.
    『장경(葬經)』에 [고장어학조자의천(故藏於 燥者宜淺) 장어탄이자의심(藏於坦夷者宜深)] 이라 하여 "여자들의 유방처럼 돌출한 산세의 혈은 생기가 부상(浮上)하기 때문에 얕게 매장하고, 평탄하거나 얕은 산세의 혈은 생기가 아래로 하침(下沈)하기 때문에 깊게 매장하라" 하였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점점 빗발이 굵어지면서 풍객의 간산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한 감마저 와 닿지만 옛말에 "풍수쟁이 고집 따를 자 없다." 란 말처럼 한번 감행한 간산은 끝을 보는 것이 풍수인의 공통된 습성이다.


    이곳 묘역에는 김향수 씨 4대조를 비롯하여, 모두 10기 이상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김향수를 국부의 반열에 올려놓은 묘혈(墓穴)은 3대 조의 묘가 진혈처(眞穴處)를 점했는데, 이곳 문중에서도 그렇다고 수긍하는 것이 대세이다. 당판에 있는 묘소들은 거의 임좌병향(壬坐丙向)의 남향 선호 판을 일구었다.
    혈장을 이루는 내룡은 호남정맥에서 땅끝기맥으로 분지한 용맥인데, 이 맥은 월출산을 크게 치올리고는, 당찬 모습으로 남하하다가 구정산과 모갑산, 월각산, 별뫼산, 서기산을 차례대로 일으키면서, 기복굴곡(起伏屈曲)과 개장천심(開帳穿心), 박환(剝換) 등으로 진행하여 한 맥을 다시 동쪽으로 들이민다.
    기맥에서 분지된 맥은 어미 맥의 진행방향과는 반대로 북동쪽으로 몸통을 크게 변환시켜 진행하다가 신학저수지부근에서 결인속기(結咽束氣)하고는 신학산으로 가는 중간 어름에서 본신 청룡과 백호를 동반한 횡룡(橫龍)으로 낙맥되어 오동지의 당판을 일구었다.
    중출룡(中出龍)의 견정(肩井)에서 용호(龍虎)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는 골육수(骨肉水)와 자손수(子孫水)는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당판을 적시고 빠져나가는 물은 풀숲으로 뱀이 꼬리를 감추듯이 나가, 그 흔적을 찾기가 여간 쉽지 않다. 또한 혈전(穴前)의 용호 골짜기를 타고 흘러드는 구곡육수(九谷六水)는 수구처 바로 앞에 조성된 지당처(池塘處)에서 도킹하는 당전취합(堂前聚合)의 형세를 이루니 대부(大富)를 배출하고도 남을 수세이다.

    또 내명당(內明堂)의 끝에서 청룡백호가 팔을 엇갈려 감으면서 혈장을 보듬듯 관쇄(關鎖)하는데, 내명당 밖에서도 외청룡(外靑龍)과 외백호(外白虎)가 연이어가며 이중 잠금 장치를 하는 주밀명당(周密明堂)을 이루면서 혈심에서 생성된 난화(煖火)를 완벽히 갈무리한다. 이곳 안산(案山)은 외명당 너머로 옥 쟁반에 물을 가득 담은 호수처럼 생긴 임천저수지 뒤에서 팔을 벌려 이곳 명당을 영접하는 외래안산(外來案山)인 만덕산(萬德山)이다. 연이어지는 산봉(山峰)은 오성체(五星體)의 형상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하여 만상만화를 자아낸다. 안산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주로 처자궁(妻子宮)과 재산궁(財産宮)을 관장한다고 보는 것인데, 용진혈적(龍盡穴的)에 수려한 안산이 혈과 정면조응(正面照應)하면 아내가 어질고, 자식은 효도하며 재물과 곡식이 앞마당에 가득 쌓인다고 보는 것이 형기론이다.



    물은 우수도좌(右水到左)하여 용호의 관쇄 중심이 되는 병파(丙破)로 출수하는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당문파(堂門破)로 태향태류(胎向胎流)가 되어 크게 발복 부귀하고 자손이 흥왕(興旺)하다는 향법이다.
    그러나 천년만년 지속되는 완벽한 명당은 없다고 했듯이 이곳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큰 흠이 발견된다. 안산인 만덕산을 한국유리주식회사가 규사 원석을 인천으로 채취해가면서 심장부위를 흉측하게 절개하는 바람에 명당의 안정된 기가 서서히 소산되어 한동안 잘 나가던 아남그룹이 점점 퇴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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