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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인조의 국구 한준겸(韓浚謙)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17. 10:00
인조의 국구 한준겸(韓浚謙)선생 묘 및 신도비
한준겸선생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복잡하다. 지도상으로는 바로 옆에 있지만 고속도로가 있어서 접근이 매우
어렵다. 네비게이션을 찍으면 고속도로상으로 나온다. 그래도 굳건히 그 길을 가야한다. 군자톨게이트까지 간다음
아깝지만 통행료를 지불하고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우측 도로공사 건물에 차를 파킹하고 어쩔 수 없이 담치기를 하여
한준겸선생 묘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담치기 안해도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한 길이 보여서 여기에 올린다.
인조의 국구 한준겸(韓浚謙)선생 묘 및 신도비
1579년(선조 1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1585년 태릉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해 예문관검열이 되어 홍문록에 오르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서·봉교·전적을 거쳐,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는데 선조가 그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수개월 만에 풀려나 원주로 이사하였다.
1592년 다시 서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도사·사서를 역임하고 원주목사가 되어 유망민(流亡民)을 초집(招集), 진휼하는 데 힘썼다.
1595년 내직으로 지평·필선·정언·교리를 역임하고,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 검상·사인·부응교·사간·집의를 지냈다.
1597년 좌부승지에 올라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병량의 보급에 힘썼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우승지·경기감사·대사성을 거쳐,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 다음해 병조참판을 거쳐, 내외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고, 그뒤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소학》·《가례》 등의 책을 간행, 보급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고, 1617년 충주에 부처되었으며, 1621년 여주에 양이(量移)되었다.
이해 오랑캐 침입의 위험이 있자 이에 대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오도도원수가 되어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그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령부사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 돌아와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자를 전주에 시종하였다.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163호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산62-4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산62-4 고속도로상에 찍힘 파평윤씨
한준겸(韓浚謙)선생 묘 및 신도비
조선 중기에 호조판서를 거쳐 인조의 장인으로 서평 부원군에 봉해진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묘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한회일(韓會一, 1589~1642 한성좌윤) 묘와 우측에 손자 한이성(韓以成, 1602~1634) 묘, 그리고 바로 앞쪽에 증손인 한두상(韓斗相, 1627~1687 돈령부 판관) 묘가 함께 조성된 4대에 걸친 묘역이다. 한준겸의 시호가 문익(文翼)이므로 그의 후손들을 문익공파라고 칭한다.
한준겸 묘는 회산부 부인 황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장명등ㆍ상석ㆍ향로석ㆍ혼유석 각 1기,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 각 1쌍이 있다. 묘표는 월두형 비신과 기대로 이루어졌고 인조 6년(1628)에 건립되었다. 한회일 묘는 정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 문인석 1쌍이 있다. 인조 23년(1645)에 세운 묘표의 비문은 신익성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한이성 묘는 유인(孺人) 죽산 안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 동자석ㆍ망주석 각 1쌍이 있다. 문인석을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동자석(46cm×43cm×1.55m)을 사용한 것은 공이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묘표는 숙종 27년(1701)에 세운 것으로 비문의 글씨는 한종노가 썼다. 한두상 묘는 숙인(淑人) 양주 조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 문인석ㆍ망주석 각 1쌍이 있다. 묘표의 비문은 이봉휘가 짓고 글씨는 한종노가 썼다.
한준겸의 신도비는 인조 7년(1629)에 세운 것이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전자는 김상용이 썼다. 이수, 비신, 귀부로 이루어져 있고, 규모는 이수가 1.42m×67cm×70cm, 비신이 1.12m×37cm×1.12m, 귀부가 3.9m×2.4m로 총높이 3.35m의 대형이다.
장대한 귀부에 푸른 빛이 감도는 대리석 비신과 생동감이 넘치는 이수의 조각, 안정감 있는 비례감각 등 조선 전기의 양식에 따라 조성한 훌륭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이 신도비는 묘역의 이장 이후 효종 3년(1652)에 효종이 내탕금을 내어 신도비를 중건하고 그 전말을 비문의 끝부분에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한편, 이 신도비는 한준겸의 묘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여m 떨어져 있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1994년에 현 위치로 옮겨져 왔으며 이때 비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