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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맹사성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30. 10:00
맹사성선생 묘
맹사성선생 묘는 광주시에서도 깊숙한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어쩌다 한번씩 가게 되는데 그래도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벌써 여러번 답사를 한 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산길을 구비돌아 선생이
타고 다니셨다는 흑기총(흑우)을 먼저 보고 묘역으로 올랐다.
물안개에 휩싸인 산세는 마치 꽃송이에 둘러싸인 형세다. 그래서 이묘를 화심이라 했나보다..
여러번 왔지만 정작 답사기에 사진을 올리는 것은 처음인듯 하다. 이제부터라도 답사를 하면 꼭
정리를 해서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올려야겠다.
맹사성선생 묘역 입구는 지금 터널을 뚫고 도로공사가 한창이라 조만간 지형이 많이 변할것 같다.
묘역이라도 잘 보전 되기를 빌어야 할듯....
조선 세종 때 황희정승으로 인해 어찌보면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맹사성선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영의정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황희정승이 18년간 영의정을 하는 바람에
영의정을 할 기회마저 갖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황희와 함께 세종 때의 명제상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한 공로야 우리가 다 알지만 그 속은 어찌했겠는지
상상만 할 뿐이다.
맹사성(孟思誠)
1360년(공민왕 9)∼1438년(세종 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다. 온양 출신.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된 데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郞)·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郞)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를 거쳐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을 때, 마침 세자가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길에 시종관(侍從官)으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한성부윤과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을 때,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太宗의 딸 慶貞公主의 夫君)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으므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자, 예조는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를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한 바 있고, 그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그는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에는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 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는데, 그는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고, 매양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양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제21호 맹사성선생묘(孟思誠先生墓)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 경기도 광주시 직동 321(철문 입구) 신창맹씨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 선생의 묘소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인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 선생의 묘소이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7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죽을 먹으면서 묘 앞에서 상을 치루어 고향에 효자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대사헌·우의정·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다.
<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태종실록』을 감수하고,『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어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봉분 앞에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조선 초기의 양식이 잘 드러난다. 경내에는 봉분의 좌우로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석등(石燈)과 묘비(墓碑)가 있다.▼ 맹사성선생 묘역 후경... 앞쪽 산에서 꽃향기가 피어난듯하다..
▼ 맹사성선생 묘역 입구에 철대문이 가로 막혀 있다.
▼ 맹사성선생 묘 입구에 있는 흑기총 안내판...
▼ 맹사성선생이 타고 다녔다는 검은소의 무덤 흑기총
▼ 맹사성선생 묘 안내판..
▼ 맹사성선생 묘역 오르는 길...
▼ 맹사성선생 묘 전경..
▼ 맹사성선생 묘
▼ 맹사성선생 묘비
▼ 맹사성선생 신 묘갈...
▼ 맹사성선생 묘갈 뒷면과 측면
▼ 맹사성선생 묘 좌우측 전경
▼ 맹사성선생 묘 석물들..
▼ 맹사성선생 묘 문인석
▼ 맹사성선생 묘 측면
▼ 맹사성선생 묘 측면에서 바라본 정면..
▼ 맹사성선생 묘 입수처
▼ 맹사성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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