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욱(韓明勗)
조선 후기 성남 출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욱재(泮哉), 호는 율헌(栗軒)이다. 한석(韓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지원(韓智源)이고, 아버지는 참판 한술(韓述)이며, 어머니는 이운(李韻)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문음(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에 의해 벼슬을 받는 것)으로 입사(入仕)하여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 호조좌랑을 거쳐, 현감으로 재직 중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4년 예조좌랑이 되었고, 이듬해 사서,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이 때 소북파의 영수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여 파직 후 평산으로 유배하게 하였다. 이어서 장령,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한 뒤 1618년 군자감정, 봉상시정을 거쳐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양서어사(兩西御史)로 파견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실각하매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30년(인조 8) 동지사 겸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642년(인조 20) 행호군이 되었고, 1646년에 자헌대부에 올라 지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부 한지원(韓智源)과 아버지 한술(韓述), 숙부 한회(韓懷)의 삼부자가 쓴 시문을 모아 『삼체집(三體集)』을 편집하였다. 1629년[인조 7]부터 1642년[인조 20]까지 14년간의 일년기(日年記) 형식의 자신의 벼슬살이와 정국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기오수록(己午隨錄)이라는 책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전해 오는데 인조 때 전란전후시대의 정국상황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여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묘소는 분당구 율동에 있다. 정부인 동래정씨와 경기도 일대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품자형식'의 삼조묘로 되어있다. 한명욱의 묘가 상이고 하좌측이 고령박씨, 하우측이 동래정씨 묘이다. 묘역과 비석, 상석, 망주석 등의 석물 양식이 특이하여 2009년 6월 25일자로 성남문화유적 제 9호로 지정되었다.
한전(韓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있는 한전의 묘. 한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09년(광해군 1)~1688년(숙종 14)에 걸쳐 살았던 사람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치숙(治叔)이며, 증좌승지 한명직(韓明直)의 아들이다.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순양군(順陽君) 안몽윤(安夢尹)의 딸이다. 종묘서(宗廟署)의 부봉사(副奉事)를 지냈다. 묘소는 서현동에서 율동공원으로 진입하여 주차장 맞은편 우측 구릉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지원의 묘 바로 아래에 안장되어 있다. 남향한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있으며, 봉분의 높이 130㎝, 동서 직경 340㎝이다. 봉분 중앙에 혼유석, 상석, 4각 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금관조복형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 1쌍씩 있으며, 묘표는 봉분 우측에 위치하여 동향한 채 봉분을 바라보고 있다. 망주석은 8각으로 좌가 높이 144㎝, 우가 높이 158㎝이며, 문인석은 머리에 삼량관(三梁冠)을 쓰고 눈꼬리를 위로 하여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一자로 다문 입의 표현 및 홀(笏)을 잡은 손가락의 표현이 뚜렷하다. 짧은 옷소매에 관복은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는데 크기는 좌가 높이 136㎝, 얼굴부분 56㎝, 우가 높이 146㎝, 얼굴부분 52㎝로 하반신 이하가 파묻혀 있다. 묘표는 형태상 비좌와 비신 월두형으로, 비좌는 네 면에 전후 2엽, 좌우 1엽씩의 안상문이 있고, 상부에 전후 4엽, 좌우 1엽씩의 복판복련문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비문은 앞뒤양면에 있는데, 앞면에 세로 석 줄로 ‘通訓大夫行宗廟署副奉事韓公諱甸之墓 淑人順興安氏祔左’(통훈대부행종묘서부봉사한공휘전지묘 숙인순흥안씨부좌)라 새겨놓았다. 뒷면에는 특이하게 비신 상부에 크게 “朝鮮國(조선국)” 3자를 가로로 새겨놓았고 하단에 공의 약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신의 앞면 우측 측면에는 직경 16㎝ 가량 탄흔으로 인한 파손흔적이 있다. 건립 시기는 1693년(숙종 19) 가을이다. 비의 총 높이는 175cm로, 비좌 높이 37cm, 너비 90cm, 두께 59cm, 비신 높이 138cm, 너비 상 54cm, 하 49cm, 두께 21cm이다.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6-2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주한씨 청련공파 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숙(韓潚)
한숙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91년(숙종 17)~1708년(숙종 34)에 걸쳐서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달부(達夫, 建夫)로, 한선경(韓善慶)의 아들이다. 재예(才藝)가 있었으나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부인인 유인(孺人) 광산김씨는 김응서(金應瑞)의 조카 딸이다. 묘표는 한지원(韓智源) 묘소 바로 뒤에 있는 한숙 묘와 배위(配位) 광산김씨의 원형 쌍분 중앙에 남향하여 있는데, 비좌와 백색 대리석제의 비신 및 평옥개석(平屋蓋石) 형태이다. 비좌는 아무런 조각 없이 상부를 45° 각도로 모줄임하였다. 비신 앞뒤 양면에 비문이 있는데, 앞면에 세로 석 줄로 “生韓公潚之墓 孺人光山金氏(학생한공숙지묘 유인광산김씨)” 비문을 새겨 놓았다. 비문은 1713년(숙종 39) 이세환(李世瑍)이 찬하고 한정(韓濎)이 서하였다. 옥개석은 흑적색으로 탈색되어 있으며 면두께 9.5cm이다. 이 양식의 묘표는 옥개석이 처마 구조 위에 지붕의 형상이 평평하게 조성된 것으로 매우 유례가 드문 예이다. 비의 총 높이는 134cm로, 비좌 높이 18cm, 너비 86cm, 두께 54cm, 비신 높이 100cm, 너비 50cm, 두께 16cm, 옥개석 높이 16cm, 너비 77cm, 두께 40cm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탈성남대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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