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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이경증 묘 및 신도비
터잡이야초
2012. 9. 13. 10:00
이경증 묘 및 신도비
네비로 이경증 묘를 찾아가는데 대략 경남아너스빌 입구까지는 왔는데 어디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않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게 하면 좋으련만 꽉꽉 틀어막고 있다.
할 수 없이 길가에 세워야하는데 그마저도 이미 도로를 점령한 차들이 많아 세울곳이 없어서 다리를
건너 유치원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서 갔다.
걸어가면서 보니 풍수에서 말하는 물길의 환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아파트를 보면서 미래를 예측해 본다.
한쪽은 환포하는 안쪽에 아파트가 있고, 다른 아파트는 물길의 배면에 위치해 있다. 시간을 두고 보면
배면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인패, 재패를 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물어오는 사람한테는
말할 수 있겠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글로 표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도 어찌보면
천기누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 곳은 스스로 공부를 터득해서 잘 찾아야 할 것이며, 우리같은 풍수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지내면 아마도 복 받을 것이다.ㅎㅎㅎ
이경증(李景曾) 1595년(선조 28)∼1648년(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성(汝省), 호는 미강(眉江) 또는 송음(松陰). 부친은 군수 이통(李通)이며, 모친은 영의정 유전(柳㙉)의 딸이다. 권필(權韠)의 문인이다. 19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 참봉으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정언,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당시 계운궁우제(啓運宮虞祭)때 부원군 이귀(李貴)와의 의견차이로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전적‧정언‧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을 가자 어사로서 호남에 내려가 식량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뒤 5, 6년간은 양사의 지평‧헌납‧사간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에서 사서‧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응교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교리 때에는 경천(敬天)‧휼민(恤民)‧납간(納諫)‧용인(用人)‧숭검(崇儉)‧돈종(敦宗)‧진학(進學)‧형내(刑內) 등 8조를 진언하여, 광해군 때의 폐풍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하여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이어서 검상을 거쳐 사인‧형조정랑으로 승진되었다. 그뒤 청주목사‧응교‧첨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환도 이후 도승지로 승격하고,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당상(軍功廳堂上)을 맡아 전국의 장사(將士)들의 공죄(功罪)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하여 침구할 기세를 보이므로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나갔다가 병으로 인하여 정직하였다가 16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 때에는 홍무적(洪茂績)‧유백증(兪伯曾) 등의 질척(疾斥)을 받았으나 왕과 다른 대간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왜인들의 간교함과 민막(民瘼)의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이듬해에 조민(趙珉)이라는 인물을 오용(誤用)하였기 때문에 찬배(竄配)되었다. 1646년에 지중추부사로 시관이 되어 시제를 시휘(時諱)에 저촉되게 잘못함으로써 이식(李植)과 함께 삭출(削黜)되어 강교(江郊)에 은거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에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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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황토유적 제46호 |
이경증 묘 및 신도비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산68-21(흥덕경남아너스빌입구 공원) |
덕수이씨 | | |
▼ 묘 앞에 있는 이경증 신도비.. 원래의 신도비는 공원에 있고 새로 세운 것이다.

▼ 이경증 신도비 안내판

▼ 이경증 신도비... 아파트 옆 작은 공원에 있다. 마모가 심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 이경증 신도비... 마모가 심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 이경증 신도비는 정방형으로 되어있다.

▼ 이경증 신도비...

▼ 새로 세운 이경증 신도비

▼ 이경증 신도비... 어떻게 이런 물구덩이 넣을 생각을 했을까...? 묘역이 상당히 넓고 세울만한
곳이 많은데 하필 물구덩이에 넣은 이유가 있을까? 이곳은 진응수 자리로 오히려 잘 보존해야할
곳인데... 조금은 안타깝다.

▼ 이경증 묘 안내판

▼ 이경증 묘 전경


▼ 이경증 묘표

▼ 이경증 묘 석물



▼ 이경증 묘 입수도두

▼ 이경증 묘 측경

▼ 이경증 묘 후경... 비록 아파트에 가려 있지만 햇빛을 받아 묘역이 깨끗하다.

▼ 이경증 묘 옆에 나란히 있는 묘... 후손 묘로 생각되나 묘비가 없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