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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영의정 이상황(李相璜)묘
터잡이야초
2013. 3. 11. 10:00
영의정 이상황(李相璜)묘
고양시에 강의를 가서 점심 나절에 짬이 나서 못가본 묘역 몇 곳을 다녀왔다. 날이
풀리면서 땅이 질퍽거려 무척 고생한 하루였지만 궁금하던 몇 곳을 마져 다녀와서
기분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아직도 북사면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서 미끄러운데 구두를 신고 넥타이를 맨 체
카메라도 없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다녔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곳은 인터넷에 나온 주소를 네비에 입력하여 찾았는데 찾아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아래쪽에 재실이 있고 그곳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남의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와서 좀 걱정을 했었지만 별 어려움은 없었다.
묘역은 근자에 신도비와 석물들을 모두 교체하여 볼거리는 없었지만 주위 사격이
좋고 지금은 공장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앞쪽 명당이 좋아 보인다.
이상황(李相璜) 1763(영조 39)∼1841(헌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옥(周玉), 호는 동어(桐漁) 또는 현포(玄圃).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4대손으로, 아버지는 승지 득일(得一)이며, 어머니는 현감 유성모(柳聖模)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이 해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에 임명되었다. 1789년 정언이 되고, 1792년 영남에 암행어사로 나가 역전(驛田)의 세금과 시노비(寺奴婢)의 신공을 줄일 것을 청하였다. 1795년 대사간을 역임하고, 1804년(순조 4)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한성부우윤·개성유수가 되었다. 1810년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812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거쳐 이듬 해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호조판서가 되었다. 1816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홍경래(洪景來)의 난 이후 마비된 장중위(壯中衛)를 폐지하고, 별친기위(別親騎衛)를 설치하였다. 1820년 이조판서를 거쳐 홍문관제학·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 등을 거쳐 1824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828년 재용 절약이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1830년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하였다. 이 해 주청정사(奏請正使)로 부사 이지연(李志淵), 서장관 윤심규(尹心圭)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1년 서울과 지방의 무뢰배가 궁방과 아문을 빙자해 쌀·소금 등의 매매를 침탈하는 것을 금하도록 주장하였다. 1829년 문안사로 청나라에 다시 다녀왔고, 1833년 영의정에 올라,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이므로 선택을 신중히 할 것을 청하였다. 1835년(헌종 1) 실록총재관에 임명되어『순조실록』 편찬을 주재하였다. 1838년 영의정을 사직했으나, 이듬해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은 검소했으며, 업무 처리는 정성을 다해 주도면밀하게 말없이 실시했다 한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저서로는『동어집』·『해영일기(海營日記)』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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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정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75-6 |
전주이씨 | | |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신도비... 묘역 아레에 있다..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신도비 전면

▼ 묘역에서 바라본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신도비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전경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비..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비 내용(측,후면)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전경.. 카메라 없이 핸드폰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역광이라 화질이 좋지 못하다.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석물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입수도두..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후경..조안산이 유정하고 명당이 넓고 평원하다..

▼ 영의정 이상황(李相璜) 묘 청룡쪽, 백호쪽 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