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영의정 정인지 부친) 묘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 묘
2014년 가을 풍수답사를 시작했다. 한 여름에는 풀이 우거지고 더위가 심해 답사를 쉬게 되는데 9월 추석이 지나고 선선해지면 각 풍수학회에서 답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여러 학회에서 동시에 시작하여 일정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가볼 곳은 많고 몸은 하나여서 어쩔 수 없이 몸 담고 있는 학회를 따라간다. 이번 풍수답사는 충남 부여 일원의 선현 묘소를 찾았다. 이번에 찾은 곳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찾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여 사진 위주로 답사기를 올릴 예정이다. 그동안 묘지답사를 제대로 못올렸는데 이번에 새롭게 시작하면서 글의 포맷을 바꿔보았다. 가을이 되니 몸이 들썩들썩하여 어디론가 답사를 떠나야 이 병은 치유된다. 그러니 이번 주말에도 또 어디론가 찾아야 할듯 하다. |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 공의 諱(휘)는 興仁(흥인)이시고, 문충공 芝衍(지연)의 증손이시며, 증찬성공 乙貴(을귀)의 장자로 문성공 麟趾(인지)의 아버지이시다. 공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태어나셨으며, 조선 太宗(태종) 때에 永春(영춘) 石城(석성)등의 현감겸 權農 兵馬 團練 判官(권농 병마 단련 판관)을 지내시고 세종 18년(1436) 9월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네이버블로그 초아의 삶과 그리움에서 인용> 묘는 조선조에서 고려분묘 형식을 따르는 묘제형식으로 봉토주변에 호석을 설치한 형태로서 호석은 잘 다듬은 판석을 80cm 높이로 팔각으로 두룬 형태이며 호석에 사용된 석재는 백제시대에 사용하던 건축자재를 재이용 한 것으로 보여진다. <부여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시도기념물 제182호 |
문화재명칭 |
부여 정흥인의 묘 |
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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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연락처) |
고도문화사업소(041-830-2511) |
▼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 묘 문화재 표지석... 2010년에 시도기념물 182호로 바뀌었는데
아직 표지석을 바꾸지 못한것 같다.
▼ 정흥인(鄭興仁) 묘 전경... 망주석이 없고 장명등도 지붕돌(옥개석)이 무너진 상태다.
▼ 정흥인 묘는 조선초기의 묘제와는 조금 다르다. 대부분 장방형인데 8각 호석을 둘렀고 묘소에 쓰인 석재도
조금 특이해 보인다. 백제시대의 폐석을 썼다고 한다.
▼ 정흥인 묘 백호쪽 문인석
▼ 정흥인 묘 청룡쪽 문인석
▼ 정흥인 묘비... 배위의 표기 방식이 조금은 특이하다.
▼ 정흥인 묘 측면
▼ 정흥인 묘 입수도두... 석맥이 돌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강한 맥이 들어온다고 보기도 하고 탈살되지
않은 기운이 들어온다고도 본다.
▼ 이곳 묘소는 속기처(束氣處)에서 비룡(飛龍)으로 치고 오르는 입수룡(入首龍)이 산정(山頂)으로 석맥(石脈)
을 잇고 있으며, 뱀이 개구리를 쫓아 내려온다는 장사추와(長蛇追蛙)란 형국명을 간직하면서 명당아래에
개구리를 유인하는 와영담(蛙泳潭)이란 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전한다.<용맥도: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에서
인용, 와영담 사진:네이버블로그 초아의 삶과 그리움에서 인용>
▼ 정흥인 묘 후경... 용호가 잘 감싸고 앞쪽의 조안산이 막아주어 빈틈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