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기념표석](종로55)사복시 터(司僕寺址)

터잡이야초 2014. 12. 3. 09:00

 

표 석 명

사복시 터(司僕寺址)

임시관리번호

종로55

설치연도

2000

표석문안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수레, 말, 마구, 목장을 맡아보던 관청의 터. 궁중에는 내사복시, 도성에는 외사복시, 지방에는 목장을 두었다. 여기에 있던 외사복시는 1907년에 폐지되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2

찾아가는 길

광화문 대림빌딩 앞

관계되는 내용

사복시(司僕寺)

 

조선시대의 여마(輿馬)·구목(廐牧)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1392년(태조 1) 고려 제도에 따라 사복시를 설치하고 수레·말·마구·목축 등을 관장하였다. 그 뒤 1405년(태종 5)에 병조의 속아문이 되고,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정3품 아문의 관청으로 정비되었다.
소속 관원으로 제조(提調) 2인과 판관(判官) 이상의 임원 2인은 장기복무인 구임(久任)으로 했으며, 장인 정(正, 정3품)은 1인으로 하였다. 그 밑에 부정(副正, 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판관(종5품) 1인, 주부(主簿, 종6품) 2인과 잡직관에 안기(安驥, 종6품) 1인, 조기(調驥, 종7품) 1인, 이기(理驥, 종8품) 2인, 보기(保驥, 종9품) 2인, 마의(馬醫) 10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속으로 서리(書吏) 15인, 제원(諸員) 600인, 차비노(差備奴) 14인, 근수노(跟隨奴) 8인, 이마(理馬) 4인, 견마배(牽馬陪) 11인, 고직(庫直) 4인, 대청직(大廳直) 1인, 사령(使令) 11인, 군사(軍士) 2인이 배정되어 있었다.

『속대전』에서는 제조 2인 중 1인은 의정(議政)이 겸임하고, 또 이마 4인, 마의 3인, 견마배 11인, 서리 20인, 제원 3,448인을 두게 하였다. 『대전통편』에서는 이마 4인을 체아직(遞兒職)으로 하되 6품은 1인, 8품은 2인, 9품은 1인으로 하였다.
사복시의 지방조직인 목장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53개, 『동국여지승람』에 87개, 『대동여지도』에 114개, 『증보문헌비고』에 209개가 전하여진다. 관찰사 관할 아래 감목관(監牧官)이 지휘, 감독했으며 그 밑에 군두(群頭)·군부(群副)·목자(牧子)가 배속되어 생산과 관리에 종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사복시 터(司僕寺址) 표석

▼ 사복시 터(司僕寺址) 표석은 대림빌딩 앞에 위치

▼ 사복시 터(司僕寺址) 표석은 미대사관 뒤, 우리은행 앞에 위치

▼ 사복시 터(司僕寺址) 표석은 종로구청 어린이집 인근에 위치한다.

▼ 사복시 터(司僕寺址) 표석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