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임진왜란 최초의 육지 전투 승전지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 양주에서 파주로 넘어가려고 길을 가는데 길옆에 큰 전적비가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전적지가 있기 때문에 6.25관련 전적비인줄 알았는데 살펴보니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라고 적혀있다. 전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맞닥뜨리면 흥분되기 까지 한다. 자세히 읽어보니 이 또한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무능은 다시 꺼내기조차 역겨운 것이지만 이곳에서 승전을 올린 장수를 모함에 의해 참수하고 뒤늦게 되돌리려 했지만 이미 형을 집행한 뒤였다 한다. 그러니 나라 꼴이 어찌되었겠는가? 이즈음에 다시한번 되새겨야할 교훈이다. 이 작은 고개에서 전투승리를 이끈 장수도 대단하고 500여년이 지난 뒤에 향토사를 정비하여 기념비를 세운 양주시민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부근의 지세는 연곡리의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신각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함경도병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서울로부터 북상하는 왜군을 해유령 입구에서 적의 선봉 부대를 맞이하여 목 70여급(級)을 베어 큰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하였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양주에서 참살되었다.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 집행 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높이 1060㎝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전첩비를 세웠으며 기단(基壇)의 면적은 약 40평 정도이다. 또한 부근에 사당도 세워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39호 |
문화재명칭 |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8-9 |
관리자(연락처) | 양주시청 |
▼ 해유령전첩비 전경...
▼ 해유령전첩비 전경...
▼ 해유령전첩비 앞에 세워진 전첩기... 글자가 퍼져서 읽기 어렵다.
▼ 해유령전첩비 앞 잔디밭에 있는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 쓰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4면을 빼곡히 써놔서 이 또한 읽기 어렵다.
▼ 해유령전첩비와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
▼ 해유령전첩지 안내문... 깔끔하다..
▼ 해유령전첩비 앞에 세워진 충현사 삼문...
▼ 충현사... 담장 너머로 찍었다..
▼ 해유령전첩비에서 바라본 입구 전경...
▼ 이곳에는 국토지리정보원의 측량기준점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