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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좌의정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터잡이야초 2019. 3. 28. 16:48


약포(藥圃) 정탁(鄭琢)


풍수답사로 예천을 찾았다. 조선시대 재상을 지낸 분들은 거의 한양 인근에 묘를 조성했는데 특이하게 재상 중에 경상도에 묘를 쓴 경우는 3분이 있다고 한다. 유성룡, 약포 정탁, 영의정 노수신 이렇게 세분이라 한다. 

정탁선생 묘가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고, 재실은 예천 호명면에 속한다. 한 마을 중앙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참 많이 불편할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이고 있다. 그곳에 금줄을 쳐놓았는데 아마도 정월대보름 때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이 행정구역이 2개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은 이런 수호신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탁선생 묘는 비룡입수로 돌형의 혈이다. 낮은 곳에 있어서 돌혈이라도 바람의 영향은 거의 없다. 묘역 주변에는 소나무를 빼곡히 심어 혹시라도 모를 바람을 차단하고 있다. 마을은 청룡이 앞쪽까지 길게 감고 있고 앞쪽 들판 또한 평탕하여 재물도 문제 없는 곳이다. 그래도 넓은 수구처가 걱정이 되었는지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를 심어서 비보를 하고 있다. 평온함을 유지하고 1000년을 이어가길 기대해 본다.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중종 21)∼1605(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출신.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산 166

관리자(연락처)

청주정씨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안내문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전경 파노라마...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는 전면이 너무 넓어 한장의 사진으로 찍기 힘들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청룡방....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전경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근경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비...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비와 석물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청룡쪽 석물...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백호방 석물...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측후방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입수도두... 비룡입수로 돌혈(突穴)을 이룬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후경.... 묘 봉분이 높아 후경이 제대로 찍히지 않는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 재실...이 건물은 예천군 호명면 본리에 있고... 바로 앞으로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경계이다. 한 마을이 예천군과 안동시로 나눠져 있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 현무봉...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맥이 내려와 묘를 만든다. 길 오른쪽은 안동시, 길 왼쪽은 예천군... 정탁선생 묘는 안동시에 있고, 재실은 예천군에 속한다.

▼ 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 재실...

▼ 약포(藥圃) 정탁(鄭琢) 묘가 위치한 마을 뒷산과 현무정... 

▼ 마을 입구에 새랄쉼터가 있는데... 600년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있다. 

▼ 600년된 보호수에 금줄을 걸어놓았다. 

▼ 600년 느티나무...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 600년된 보호수인데...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마을이 가운데 도로를 중심으로 2개의 지자체로 나뉘어 있으니 여러가지로 불편할텐데 큰 무리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의아하다. 이렇게 노거수로 별탈없이 지내는 마을 수호목의 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