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관악산과 낙성대,정정공묘...
회사에서 관악산에 등산을 겸해 단합대회를 하여 다녀오면서 낙성대와 정정공묘를 답사했습니다.
관악산 등산을 위해 진입한 낙성대공원
낙성대 공원 옆에 있는 서울시과학관... 야외에서 학생과학전시회를 하고있었다..
관악산을 오르며 바라본 봉천동쪽 풍경...
관악산 국기봉 모습... 회사 사람들과 함께해서 국기봉까지만 갔다 왔다..
낙성대 공원
강감찬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이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집터에 3층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현재의 낙성대는 서울특별시에서 강감찬의 애국충정의 정신을 기리고자 1973~1974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사괴석(四塊石)으로 409m의 담장을 쌓고 안국사(安國祠)를 짓는 등 일대를 공원으로 정비한 것이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맞배지붕의 안국문(安國門)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사당 안에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공원의 총면적은 31,350㎡이나 성역화된 곳은 11,550㎡이며, 안국사의 면적은 237.6㎡이다. 공원 경내에 5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놓았다. 안국사 앞에는 원래의 낙성대 터에 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석탑을 옮겨 놓았다.
낙성대공원의 강감찬 장군상
낙성대의 홍살문...
낙성대 인근에 있는 낙성대유허비...
1974년8월21일 지정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관악구 봉천동 218-4에 위치한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리탑식3층 석탑을 세우고 후세에 전하여 왔다. 1973년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이 석탑을 안국사의 경내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1974년 따로 높이 2m의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강감찬 장군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위치한다.
낙성대 휘호...
낙성대 안내판...
낙성대 공원 안내그림...
낙성대 외삼문인 안국문...
낙성대 주인 강감찬 장군 영정을 모셔놓은 안국사...
낙성대 사적비...
낙성대 유허지에 있던 삼층석탑...
화강암으로 된 이 탑은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4.48m이다. 석탑의 첫층 탑신 앞면에 ‘姜邯贊 落星垈’라는 명문(銘文)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 탑 이름을 ‘강감찬탑’ 혹은 ‘강감찬낙성대탑’이라 부르고 있다.
탑의 양식은 단층기단 위의 3층탑으로, 노반 이상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기단석은 각 면마다 한 장의 면석이 둘러 있고, 면마다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한 장의 돌로 된 갑석 역시 그 한가운데에 옥신 받침이 있다. 탑신의 옥신석에는 각기 우주가 모각되었고,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며, 층급(層級)은 2단으로 매우 간결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정기를 줄이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 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왜군들은 탑만이 아니라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이 탑에 연유하여 이곳 옛 마을을 ‘탑골’이라 하였다.
낙성대 외삼문에서 바라본 전경...
이순신 장군 5대조(祖) 이변(李邊) 음택 <관악구 낙성대동>
이변은 1391년(공양왕 3)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이공진(李公晋)의 아들로 태어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와 호는 미상(未詳)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5대조이다.
1419년(세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무원(承文院)의 박사(博士)에 보임되었으며, 한어(漢語)와 이학(吏學)을 독학하여 이에 밝았으므로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가 1427년(세종 9)에는 사역원(司譯院)의 판관(判官)이 되었고, 이후로는 다른 관직에 제수되더라도 늘 승문원과 사역원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 뒤 전농시판관(典農寺判官), 호군(護軍),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 봉상시윤(奉常寺尹), 대호군 등을 지내고, 1438년(세종 20)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이듬해에 사은사(謝恩使) 민의생(閔義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 예조참의,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1448년(세종 30)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후 형조, 예조, 이조, 병조참판 직을 두루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면서 공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60년(세조 6) 중추원사(中樞院使)로 70세가 되어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한어와 이학에 밝다 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하였고 1467년(세조 13)에는 궤장( 杖)을 하사받았다.
정정공 이변 신도비
정정공 묘소 전경... 묘소가 너무 넓어 한화면으로 잡히지 않는다...
정정공 묘소 백호쪽 전경...
주변의 보호사(保護砂)는 후손들의 묘가 즐비한 청룡자락보다 백호가 더 유정하게 응기(應氣)하면서 장손계열보다는 지손(支孫)이, 문관(文官)보다는 무관(無官)의 배출이 예고된다.
정정공 묘 청룡쪽 전경...
정정공 묘 조안산.. 관악산의 석산 모습이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