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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능성구씨 4세)

터잡이야초 2021. 12. 16. 11:39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한동안 코로나로 인해 풍수지리 현장답사를 함께 하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녀오곤 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가싶어 몇 군데 다녀왔는데 또다시 코로나 대유행에 부딪혀 모든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충남 당진에는 풍수적으로 의미있는 묘가 몇 군데 있는데 다녀와서 글로 올리려니 시간만 자꾸 가고 내용은 잘 기록되지 않고 해서 요즘은 거의 글을 못 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능성이란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능주를 말하는 것으로, 능성 구씨(具氏)의 시조(始祖)가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장군(檢校將軍)을 지낸 구존유(具存裕)이다. 그는 한림학사출신인 주적덕의 딸과 결혼하여 능성에 생활근거지를 정하면서,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진에 터를 점한 구예(具藝)는 고려 때 명신(名臣)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의사(判典儀事)를 지냈으며, 지금도 그의 충효(忠孝)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 면천(沔川)에서 사패지지(賜牌之地)를 하사 받아 면천부원군(沔川府院君)에 임명되었다.
이곳 신암사는 구예(具藝)가 먼저 별세하자 아주신씨 부인이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해 지은 암자(庵子)라고 전한다. 처음에는 구룡사라고 하다가 후에 신씨를 기리는 뜻에서 신암사로 바꿨다고 한다.
이곳의 내룡은 안산 너머에서 들어오는 용맥이 우측으로 진행하면서 백호자락을 일구고, 몸통을 빙 돌려 좌측으로 행룡하여 90도로 몸통을 꺾어 횡룡입수(橫龍入首)로 작혈하였다. 혈장에서 앞을 바라보면 마치 회룡(回龍)한 용맥이 본신(本身, 안산)의 꼬리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나가던 본맥(本脈)이 횡으로 지각(支脚)하나를 더 뻗어 청룡(靑龍)을 만들었는데, 전반적인 국세(局勢)가 한문의 야자(也字) 형상을 하고 있다. 어찌보면 영천의 광주이씨 시조묘 형상과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맥이 가파르고 물이 쏜살같이 흘러 어려움이 있을터인데 이곳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 한번더 세심히 관찰하게 된다.
아무튼 능성구씨(綾城具氏) 중 이곳 예(藝)의 자손들이 제일 번창하였다고 하는데, LG그룹의 구자경 회장도 이곳 손(孫)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에 예(藝)의 묘소를 정하고 난 뒤로, 자손들이 발복을 받아 승승장구하였다는 구씨 문중의 설명이다.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정양향(正養向)은 양향(養向)에 절파(絶破)로, 구빈(救貧) 양균송의 진신수법(進神水法)에 해당한다. 이것은 구성(九星)의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漁)로, 녹존방(祿存方: 복록방)으로 물이 빠져나가 금어(金魚: 고려 때 4품 이상의 관리와 특사들이 관복을 입을 때 허리띠에 차던 붕어처럼 생긴 황금빛 주머니)를 찬다는 뜻이다. 또한 정양향은 귀인녹마상어가(貴人祿馬上御街)라 하여 최고의 길향(吉向)으로, 인정(人丁)과 재물이 왕성(旺盛)하고, 충효현량(忠孝賢良)한 자손들이 나오고, 특히 셋째자식이 먼저 발응(發應)이 되며, 여식(女息)들은 미인(美人)을 배출한다는 향법(向法)이다.<석초 채영석 답사기 인용> 

 

묘역에 최근에 7세조 구성량(具成亮) 단(壇)이 설치되었는데 구예(具藝) 묘와는 다르게 넓은 터에 유혈로 조성을 하다보니 바람이 무섭다. 앞쪽을 막아주는 조안이 낮아 바람을 차단해야 하는데 현재는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어느정도 차단효과를 보고는 있다고 생각된다. 묘역을 조성하면서 다행히 구예(具藝) 묘 청룡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생각된다.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구예(具藝)는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면성 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구예가 사망하자 부인이 구예의 묘소를 송악읍 가교리에 조성하고 신암사(申庵寺)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구예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구연(綾珚)의 일곱째 아들이다. 부인은 도염서 령(都染署令) 신진승(申晉升)의 딸 아주 신씨(鵝洲申氏)이다. 
구예는 1317년(충숙왕 17) 구재삭시(九齋朔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중대광 판전의시사(重大匡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면주(沔州)[면천]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면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능성 구씨는 이때부터 송악읍 가교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전설에 의하면, 구예가 원나라로 가는 길에 어느 부부의 목숨을 구했는데 이들이 나중에 구예의 묘소를 현재의 장소에 정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구예가 사망하자 부인인 아주 신씨가 구예의 묘소를 미리 정해 둔 송악읍 가교리 신암산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묘소 옆에 신암사를 짓고 인도에서 금동 불상을 들여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현재 신암사에는 구예와 아주 신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구예의 묘소는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에 있다.<디지털당진문화대전에서 인용>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 구씨(綾城 具氏)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구존유(具存裕)는 고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냈다.
2세는 평장사(平章事) 구민첨(具民瞻), 3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 4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5세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이다.[1] 6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위(具禕)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구흥(具興)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구의(具義)가 있다. 7세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은 고려 말 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조선의 개국 후 은둔하여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능성 구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4명, 무과 급제자 363명, 왕비 1명, 부마(駙馬) 3명, 상신(相臣) 2명, 공신 9명, 생원·진사 173명을 배출하였다. 과거 급제자는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3파가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9세손 구치관(具致寬)이 조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구치관의 동생 구치홍(具致洪)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구치관의 조카 구겸(具謙)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인 구현휘(具賢暉)·구수영(具壽永),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른 구문신(具文信), 중종의 부마가 된 구사언(具思彦), 인조의 외조부로서 이조판서·좌찬성·숭록공신(崇祿功臣)에 오른 구사맹(具思孟), 참판·대사헌을 지낸 구봉령(具鳳齡) 등이 있다.
무과 출신 가운데 영조 때까지 종2품의 장신급(將臣級)이 9명이나 배출되었는데, 당시 장신의 1/12에 해당한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구사직(具思稷), 훈련대장 구굉(具宏), 어영대장 구인후(具仁垕), 공조판서 구인기(具仁墍), 어영대장 구문치(具文治), 총융사(摠戎使) 구감(具鑑),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구선복(具善復)이 있으며, 구굉·구인후·구인기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되었다. 구인기는 1675년 능풍부원군(綾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어머니이자 원종의 비인 인헌왕후를 배출하여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의 외척으로 가문의 세를 떨쳤다.<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63
관리자(연락처) 능성구씨

 

▼ 능성구씨 4세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역

▼ 능성구씨 4세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역

▼ 능성구씨 4세조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용맥도... 야(也)자 형국이다.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전경... 묘는 상단에 있고 석물은 전순이 좁아 아래쪽에 별도로 놓았다.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아래에는 5세조 구영검, 6세조 구위 단이 놓여있다.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신도비와 묘비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석물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는 앞쪽에 있고, 배위 아주 신씨가 뒷쪽에 있다.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후경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묘 현무봉과 횡룡입수

 

▼ 능성 구씨 7세조 구성량(具成亮) 단(壇) 입구

▼ 능성 구씨 7세조 구성량(具成亮) 단(壇)

▼ 능성 구씨 7세조 구성량(具成亮) 단(壇) 후경... 조안산이 낮아서 앞쪽 소나무로 비보한 것은 좋다.

▼ 능성 구씨 7세조 구성량(具成亮) 단(壇)을 내려오며 바라본 선조들...

▼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재실

 

신암사(申庵寺)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1200년대에 고려의 중신이었던 구예(具藝)의 부인 아주신씨(鵝洲申氏)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불상은 인도에서 가져왔으며, 신씨가 세운 암자라고 하여 신암사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서 19세기 말에 중수하였고, 1995년에도 중수가 있었다. 전내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제987로 지정된 당진신암사금동불좌상은 순동으로 만들어서 장정 50여 명이라야 들 수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창건 당시에 건립한 7층 석탑이 있다. 이 절은 고려 말에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받으면서 보호되었던 사찰이다.

 

▼ 신암사(申庵寺)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의 부인 아주신씨가 남편을 위해 창건했다고 전한다.

▼ 신암사(申庵寺) 7층석탑... 탑은 6층만 남아있다.

▼ 신암사(申庵寺)의 반가사유상

▼ 신암사(申庵寺) 금동여래좌상(보물 제 9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