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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홍경주, 봉성군 묘.. 외할아버지와 외손자가 나란히..

터잡이야초 2011. 5. 7. 10:00


 홍경주(洪景舟)


 미상∼1521년(중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제옹(濟翁). 봉사 임(任)의 아들이며,  딸이 중종의 후궁 희빈홍씨(熙嬪洪氏)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를 거쳐, 1504년 지평에 올랐다. 연산군이 국정 을 어지럽혀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1506년(중종 1)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중종반정을 도모 할 때,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 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동부승지에 올랐다. 곧이어  도승지에 오르고,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이듬해에 이과(李顆) 등이 견성군(甄城君: 성종의 아들)을 옹립하려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처리한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다시 책록되었다.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여 경연에서 국사를 논의하였다.
 그뒤 판중추부사로 잠시 옮겼다가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좌참찬·좌찬성을 지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들이 정부 요로에 대거 등용되어 훈구세력을 비판하며, 공로 없이 정국공신에 책록된 자가 많다고 하여 그 개정을 요구하니, 1516년 그는 정국공신의 명단을 개정하는 척하면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하였다.
 당시 사림들이 훈구세력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정국공신의 일부를 삭제하고자 하니, 남곤·심정 등은 홍경주의 딸 희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조광조를 모략하고, 홍경주는 훈구세력을 대표하여 조광조의 일파를 처형해야 한다고 밀고하였던 것이다. 이때 죽은 사람을 후일 기묘명현이라 하였다.
 그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을 다시 역임하고, 1521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도열(度烈)이다.

 

홍경주의 묘 전경

 

  홍경주의 재실

 

홍경주의 재실 삼문

 

홍경주의 구 재실

 

홍경주의 묘 전경

 

홍경주의 묘 청룡쪽 망주석

 

홍경주의 묘 장명등

 

홍경주의 묘 백호쪽 장명등

 

홍경주의 신도비

 

홍경주의 묘 후경...

 

홍경주의 묘역에 핀 꽃들..

 


봉성군(鳳城君)


 1528(중종 23)∼1545(인종 1). 조선 중기의 종실. 중종의 여섯째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희빈홍씨(熙嬪洪氏) 소생이며, 영의정 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다.
 1545년(인종 1) 인종의 병사를 계기로 정세를 만회한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은 정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고, 아울러 종친 중에서 명망이 있었던 봉성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백령(林百齡)은 때마침 하옥된 이덕응(李德應)을 위협하여 봉성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여 죄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기는 “인종의 병이 위독할 때 윤임(尹任) 등이 봉성군으로서 왕위를 이으려고 하다가 형세가 불가하여 명종에게 전위하였다.”고 참소하는가 하면 1546년 가을에는 김명윤(金明胤)이 밀계로서 익명서를 올려 모역을 고변하니, 양사(兩司)에서 대의로 처벌을 논의, 마침내 울진에 유배되고, 이어서 송인수(宋麟壽)의 옥사를 일으켜 사사되었다.
 1570년(선조 3) 이준경(李浚慶)의 계청(啓請)으로 신원되고 복관되었다.

 

 

  봉선군 묘의 전경

 

봉선군 묘비..

 

봉선군 묘 백호쪽 석물

 

봉선군 묘 청룡쪽 망주석

 

봉선군과 부인 동래부부인 정씨 묘

 

봉선군 묘의 후경... 외할아버지 홍경주으 묘에서 흘러나온 맥을 받아 먹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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