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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남양주]좌찬성 입암 민제인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3. 30. 10:00

    좌찬성 입암 민제인 묘


    남양주 여흥민씨 입향조인 민제인 선생 묘는 보검출갑형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의 대원군 부인, 

    명성황후 민씨, 순조 비 순명효황후 등 왕비들이 모두 민제인 선생 후손들이다.

    후배와함께 남양주 묘소를 답사하던 중 해가 져서 돌아오는 길에 뭔가 여운이 남아 예전에 풍수답사 하면서 

    보았던 민제인 묘를 함께 답사하였다. 여흥민씨 후손들 묘가 이곳에 많이 있는데 천천히 올릴 예정이다.

    4월부터는 주소만 올리고 네비게이션주소는 항을 없앨 예정입니다. 이점 이해 바랍니다.

    민제인(閔齊仁)
    1493년(성종 24)∼1549년(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 전적(典籍) 민구손(閔龜孫)의 아들이다.
    1520년(중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다가 이듬해 승정원주서로 탁용되었다.
    그러나 이때 〈척간유생도기(擲奸儒生到記)〉를 가필하였다고 하여 탄핵을 받아 잠시 물러났다.김안로(金安老)가 물러난 1525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필(史筆)에 종사하였고, 1528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531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서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문신제술시(文臣製述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36년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국왕의 명을 받아 〈구언전지(求言傳旨)〉를 지어 올렸다. 승정원에서 3년 봉직한 뒤, 1541년 외직으로 나아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중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종 때 사헌부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에게 의부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齊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驪原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547년(명종 2) 좌찬성에 올라 진휼사(賑恤使)를 겸임하며 민심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548년 윤원형일당은 을사사화를 은폐시키고자 당시 시정기(時政記)의 집필자인 안명세(安名世)를 죽이고 시정기를 고치려 하였다. 이에 그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간당(奸堂)들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이어 대사간 진복창(陳復昌) 등의 탄핵으로 녹훈이 삭제되고 공주로 귀양갔다.
    적소에서 을사사화에 참여하여 많은 선비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고 지내다가 죽었다.
    문장과 역사에 능통하였으며, 저술로는 《입암집》 6권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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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정
       좌찬성 입암 민제인 묘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산73-17
       생략
       여흥민씨


     

     

     

     

     

     

     

     

     

     

    보검의 칼끝에 묘를 쓰고 왕비가 속출한 여흥민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삼패동에는 고종의 어머니(이하응의 처)와 고종의 왕비인 명성왕후, 그리고 며느리인 순종의 왕비 등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했다는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 명당이 있다. 이 묘는 금곡에 있는 홍릉의 백호에 해당되며, 천마산에서 내려온 주룡이 회룡고조(회룡고조)한 혈로서 호적산이 주산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묘는 명성왕후 13대조가 왕비와 재상이 속출할 수 있는 땅으로 선정한 곳이라 한다. 그 중 보검의 칼끝에 쓴 묘의 자손이 더욱 영달했다고 한다. 보검의 칼 몸도 모두 좋기는 하지만 칼은 뭐니뭐니해도 칼 끝에 가치가 있으니 그곳이 진혈이라고 한다. 고종이 홍릉을 왕릉으로 선정하기 위하여 묘지를 중심으로 20리 안의 땅에 무덤을 쓰는 것을 금하고 원래부터 있었던 것도 이장시켰다. 이때 이장된 묘지가 600기도 넘었으나 민씨의 묘만은 그대로 두었다. 즉 고종의 어머니가 민씨이고, 그의 왕비가 민씨이며, 또 세력가인 민씨의 묘를 왕명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묘지가 보검출갑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손을 대면 화를 당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의 풍수[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최길성 옮김, 민음사]에서 발췌>

     

     

     

     

     

     

     

     

     

     

     

     

     

     



    ▼ 여흥민씨 남양주 입향조인 민제인 신도비.. 1668년 세워진 민제인 신도비는 노론인의 신도비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우암 송시열이 撰하고, 동춘당 송준길이 書하고, 문곡 김수항이 篆하였다..

    ▼ 민제인 묘는 신도비문에 의하면 처음에 회덕 삼정동에 정해졌으나 후에 경기도 양주군 명우리에

     이장되었다고 써있다 한다.(신도비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음) 

    ▼ 좌찬성 민제인 묘

    ▼ 민제인 묘표... 잘 보면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五衛都摠府都摠官 贈諡    公 閔齊仁之墓라고 적혀있다. 증시(贈諡) 다음에 비어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비워둔 것으로 후에 시호를 받을 것을 예측하고 비워둔 것이었으나 약 4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채워지지 않고 있다.

    ▼ 민제인 묘 석물..

     

    ▼ 민제인 묘 장명등

    ▼ 민제인 묘 석물들...

    ▼ 민제인 묘 입수도두

    ▼ 민제인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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