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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안동권씨 대사헌공파 묘역(3)(권극지,권극관)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21. 09:00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중(擇仲).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의를 지낸 권령(權齡)이고 할아버지는 상주목사 출신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권박(權博)이다. 아버지는 종묘서령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추증된 권덕유(權德裕)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우찬성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1466~1543]의 딸이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 동생은 사산감역관을 지낸 권극관(權克寬)이다.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병마사 이이수(李頤壽)의 딸이다.
권극지(權克智)[1538~1592]는 1558년(명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춘추관의 기주관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봉교와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형조좌랑·병조좌랑에 이어 충청도사, 직장, 사예, 사성, 직제학,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대사헌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91년 형조참판에 이어 동지경연, 예조판서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 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맡아 밤낮으로 나랏일을 챙기다 병을 얻어 사직하였다. 전란 걱정에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다가 4월 28일 피를 토하고 죽었다.
권극지는 표(表)와 책(策)을 짓는 솜씨가 뛰어나 문관을 대상으로 한 정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또한 공과 사가 분명하고, 일 처리를 합리적으로 하였다. 한번은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도량이 좁다고 직언하여 노여움을 샀다. “어떤 일이 그렇단 말인가?” 하고 묻자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혀 임금이 아무 말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권극지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평화로]에 있다. 부인은 1617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양주군 천전리에 안장하였다. 사위인 좌의정 대제학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외손 12세손 권부승(權溥承)이 썼다. 최근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 인용>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중(制仲).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권령(權齡), 할아버지는 상주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권박(權博)이다. 아버지는 종묘서 영을 지냈고 좌참찬에 추증된 권덕유(權德裕)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우찬성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1466~1543]의 딸이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 예조판서를 지낸 권극지(權克智)이다. 부인은 함안 윤씨(咸安尹氏)로 경양군(景陽君) 윤수환(尹壽環)의 외손녀이자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딸은 윤숭(尹嵩)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손을 남기지 못하였다. 아들 권창국(權昌國)도 일찍 죽어 권극례의 셋째 아들 좌랑 권득기(權得己)를 후사로 삼았다.
권극관(權克寬)[1546~1613]은 천성이 쾌활하고 온화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반듯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처음 읽는 글도 대략의 뜻을 알 정도로 총명하였다. 과거 공부를 하던 중 학문의 참뜻을 저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실망하여 출세를 포기하였다. 그 후 한강 변에 집을 지어 밭 갈고 낚시를 하면서 20년을 보냈다.
양식이 자주 떨어질 정도로 가난한 살림을 보고 상서 양공(尙書兩公)이 벼슬을 권하여 사산재식감역관(四山栽植監役官)[한양의 백악산, 목멱산, 인왕산, 타락산에 소나무를 심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감시하던 벼슬]이 되었다. 뒤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토목 일을 맡아 하는 관청의 벼슬]을 맡았다. 권극관은 일 처리를 공평하게 하였고, 자신이 부리는 아전들에게 이르기를 “아전이 잘못하면 관헌이 파면시켜야 한다.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남들과 좋지 않은 일로 엮이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니 모두가 수긍하여 양심껏 일하였다.
권극관은 성품이 소박하고 예의가 발랐다. 중국 사람이 그의 예절에 반해 청포(靑布)로 만든 복건과 베로 만든 학창의(鶴氅衣)[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져 있으며 가장자리에 검은 천을 댄 윗옷]를 선물하니 평소에 즐겨 입었다. 남양에 이사하였을 때 향촌의 유림들이 권극관의 소탈함과 자잘한 일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경시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욕심이 없고, 초연한 사람인 것을 알고 나서는 모두가 존경하였다.
1590년(선조 23) 가을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고,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다. 1595년(선조 28) 가을 남양 비파항으로 옮겼고, 1611년(광해군 3) 의약품을 구하기 쉽도록 도성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2월 19일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권극관의 묘소는 양주시 산북동[평화로]에 있으며 부인과의 합장묘다.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지은 묘갈(墓碣)이 1685년(숙종 11) 3월에 세워졌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안동권씨 대사헌공파 묘역(권극지,권극관)
소재지
경기 양주시 산북동 329-10
관리자(연락처)
안동권씨대사헌공파종중
▼ 안동권씨대사헌공파 묘역 위성사진 위치도
▼ 안동권씨대사헌공파 묘역 신도비군... 좌측이 권극지 신도비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신도비
▼ 안동권씨대사헌공파 묘역... 좌측에 보이는 묘가 예조판서 권극지 묘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 전경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갈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구 묘갈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 석물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 입수도두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 후경
▼ 예조판서 권극지(權克智) 묘에서 바라본 이극관 묘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 전경... 이극관은 이극례, 이극지의 막내동생...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 전경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갈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구 묘갈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 석물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 청룡쪽에 부친 권덕유 묘가 보인다.
▼선공감역(繕工監役) 권극관(權克寬) 묘 후경... 아침 일찍 방문하여 묘역에 서리가 그대로 있고 덤으로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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