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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노작 홍사용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5. 3. 10:00
노작 홍사용 묘
홍사용 묘는 노작근린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 아랫쪽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있는데 어디에도 묘역
안내도 가 안보인다.
그래서 무작정 산을 걸으면 나오겠지하고 산 정상으로 진입을 했더니 정상 아랫쪽에 묘가 보인다.
공원에는 그의 일대기와 작품활동경력이 새겨져 있다.
홍사용(洪思容)
1900년∼1947년. 시인.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출생.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헌병부위를 지낸 홍철유(洪哲裕)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한식(韓植)이다.
그는 생후 100일 만에 서울 재동(齋洞)으로 옮겨 자랐으나,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여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곳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 기미독립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된 바 있다. 얼마 뒤 풀려나 귀향하여 정백(鄭栢)과 함께 수필 〈청산백운(靑山白雲)〉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유고로 전해지다가 근래에 공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작품이 되고 있다.
문단활동으로는 박종화(朴鍾和)‧정백 등 휘문교우와 함께 유인물 〈피는 꽃〉과 서광사(曙光社)에서 《문우(文友)》를 창간한 것을 비롯하여, 재종형 사중(思中)을 설득하여 문화사(文化社)를 설립, 문예지 《백조(白潮)》와 사상지 《흑조(黑潮)》를 기획하였으나, 《백조》만 3호까지 간행되었다.
그의 시작활동은 《백조》 창간과 함께 본격화되어 《개벽》‧《동명(東明)》‧《여시(如是)》‧《불교》‧《삼천리》‧《매일신보(每日申報)》 등에 많은 시‧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백조》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비롯하여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묘장(墓場)〉‧〈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편과 민요시 〈각시풀〉‧〈붉은 시름〉 등 수편, 소설 〈저승길〉‧〈뺑덕이네〉‧〈봉화가 켜질 때〉, 희곡 〈할미꽃〉‧〈출가(出家)〉‧〈제석(除夕)〉 외에도 수필 및 평문이 있다.
극단활동으로는 1923년 토월회(土月會)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직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박진(朴珍)‧이소연(李素然)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였고, 1930년 홍해성(洪海星)‧최승일(崔承一)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손수 희곡작품을 써서 직접 출연하는 등 연극활동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그뒤 8‧15광복을 맞아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지병인 폐환으로 1947년에 죽었다.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감을 형상화한 초기의 사설적(辭說的)인 장시(長詩)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 하여 민족관념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등 일련의 시작들은 장시를, 그리고 〈봄은 가더이다〉‧〈해저문 나라에서〉 등은 민요시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시문학사적 위치로 볼 때 1920년대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보인 ‘어머니’와 동심적 비애, 향토적 서정, 자전적 전기 등의 감상적 색채는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향리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화성시 향토유적 제14호 노작 홍사용 묘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 산77(노작공원 내) 화성시청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작가인 노작 홍사용(1900~1947)의 묘로 화성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홍사용(洪思容, 1900.5.17~1947.1.7)의 본관은 남양, 호는 노작(露雀)이며 아버지는 대한제국 통정대부(通政大夫) 육군헌병(陸軍憲兵) 부위(副尉) 홍철유(洪哲裕),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 具氏)이다. 1900년 5월 17일(陰曆)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고 8세 때인 1907년 군대해산으로 아버지와 함께 석우리로 이사한 후 휘문의숙에 입학한 17세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1919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3·1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나 귀항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근대 문학의 뛰어난 시인으로 신문학 초기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였으며 대표작인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비롯하여 20여편의 시와 「각시풀」 등 여러 편의 민요시, 「저승길」, 「뺑덕이네」 등의 소설, 「할미꽃」 등의 희곡, 그리고 몇 편의 수필과 평문을 남겼다. 극단 토월회에 참여하여 신극운동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1929년경부터 친구인 박진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한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한의로 생계를 잇기도 하였다. 1940년부터 다시 방랑생활을 시작하여 강경,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며, 사찰순례 및 불경 연구 등을 하였다고도 전한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건국청년단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폐환으로 1947년 사망하였다.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 불당골에 위치한 묘소는 부인 원주원씨와 합장묘로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시비(詩碑)-나는 왕이로소이다"와 8각형의 호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표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표에는 전면에 ‘露雀南陽洪氏思容之墓 配原州元氏?右"라고 새겨져 있고, 시비(詩碑)는 소당 이수덕이 썼다. 묘소 입구에는 ‘우리문학기림회"에서 세운 안내석이 위치해 있다. 앞으로 노작의 생가인 인근 한옥을 개보수하여 기념관을 건립하고 마당에는 소규모의 무대를 꾸며 마당극 공연을 하는 등 주변을 노작 홍사용 문학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화성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홍사용 묘비..
▼ 홍사용 묘
▼ 홍사용 시비
▼ 홍사용 묘 측경..
▼ 홍사용 묘 입수도두...
▼ 홍사용 묘 후경
▼ 홍사용 묘 안내판
▼ 처음부터 이 길로 왔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을...
▼ 홍사용 작가연보
▼ 작품연보
▼ 홍사용 기념관.. 이쪽길로 내려오면 된다...
▼ 홍사용 작품과 사진... 잘 생기셨다..ㅎ
▼ 홍사용 작품 청산백운과 내용
▼ 홍사용 작품..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 묘가 있는 노작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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