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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천안]연평부원군 이시백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30. 10:00

    연평부원군 이시백 묘

     

    천안답사에서 처음부터 산꼭대기에 있는 계성군 묘를 답사하는 바람에 기운이 빠져 그 다음부터는 왠만하면 적당히

    사진만 찍고 돌아오려는 생각으로 몇군데는 아예 묘지를 올라가지 않았었다. 이시백 신도비는 마을 입구에 있고 묘역도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서 올라갔다 왔지만 여전히 몸은 찌뿌둥했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 묘 옆에 있는 다른 묘들은 아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답사한지 꽤나 시간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사진만 올리고 추후에 내용을 추가하는 방식을 택할 예정이다.

    이시백(李時白)
    1581년(선조 14)∼1660년(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며, 이시방(李時昉)의 형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으로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하여 길목을 지켰으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하여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여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하였던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로 나아갔고, 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이 되고,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영입하였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하였고, 다음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아들 이유(李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자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음해에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곤궁에 처하였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았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을 것을 바랐고, 중신들도 그러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는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를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스스로 토벌할 것을 자원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하였다.
    그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나자 아우 이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조석윤(趙錫胤) 등이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자 이를 신구(伸救)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고, 다음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능을 수원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는 그곳이 교통이 빈번하여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그는 일곱번이나 판서를 역임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문화재자료 제393호
       천안 이귀,이시백 영정(이시백 묘는 미지정)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407-5
       연안이씨 충익공 시백파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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