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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경문(南景文)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26. 10:00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경문(南景文) 묘
수서에서 분당을 가다보면 경원대(가천대학) 앞쪽 즈음에 우측 산에 커다란 묘 하나가 보인다. 누구묘
인지 주위에 간판이 없어서 항상 궁금했었는데 몇년전에 뉴스에 이 묘로 인해 분당-수서간 도로의 터널이
두개가 생겨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묘가 의령남씨 묘인데 여기서 정승,
판서가 30여명이 나왔다고 한다. 후손들이 도로를 낼때 묘역의 청룡,백호를 유지하도록하여 터널로 청룡,
백호를 만들어 놓았다고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참 대단한 후손들이구나 하고 생각만 하다가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묘가 남재선생의 아들 묘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답사를 많이 다녀와 묘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어 직접 찾아가는 것은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이제사 겨우 찾아가게 되었다.
묘지답사를 하는날은 세계핵정상회의를 하기 전날이어서 성남비행장 주변에 경비가 삼엄했다.
남경문선생 묘는 성남비행장 주변에 있다보니 그곳에 경계병이 가로막고 답사를 못하게 했다. 간신히 묘역만 오른다하고 올랐는데 계속 따라다니며 눈총을 주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그래서 남경문 묘역 윗쪽과 좌측에 산재되어있는 후손들 묘는 돌아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우리는 항상
얻은 것 보다 놓친것 이루지 못한것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이룬 것도 많은데.... 이날도 만약 묘역조차
오르지 못하게 강력하게 막았으면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사 자체를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답사를 하게 해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듯..
감사하게 생각하면 만사가 좋아지는 것을... 오장육부가 다 제자리를 찾아서 건강에도 아주 좋다..ㅎㅎ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경문(南景文)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며, 조선조 개국공신인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의 아들이다. 장남은 충간공(忠簡公) 지(智), 차남은 간(簡), 3남은 조선 태종의 4녀 정선공주의 남편 소간공(昭簡公) 휘(暉)이다. 병조의랑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일찍 요절하여 약력이 자세하지 않다. 배위(配位)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방씨(溫陽方氏)는 참의 방순(方恂)의 딸이다.
봉정대부(奉正大夫) 병조의랑(兵曹議郞)을 역임하다가 26세에 요절하여 약력이 자세하지 않다.
묘소는 숙녕택주 온양방씨와의 합장묘로서 하단부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높이 40㎝, 너비 170㎝ 가량의 화강암제 장대석을 둘렀으며, 후면에는 활개를 대신하여 150㎝의 거리를 두고 높이 26㎝, 너비 240㎝ 가량의 화강암제 장대석을 2단으로 둘렀다. 봉분의 형태는 전방후원(前方後圓, 앞쪽은 사각형, 뒤쪽은 둥근 모양)인 고려묘제(高麗墓制)의 양식이다.
봉분의 앞면에 혼유석 1기, 상석 2기, 향로석 1기와 상석 좌우에 장명등 각 1기, 문인석, 무인석 각 2기, 묘갈 등 다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 중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 문인석은 턱이 뾰족하며, 눈, 코, 입 등은 윤곽만 확인되고, 홀(笏)을 마주잡고 있는 두 손은 왜소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인석은 큰 눈과 코 및 안면 볼의 윤곽이 뚜렷하며, 턱 밑에는 수염이 나 있다. 또한 두 손은 복부에서 총길이 68㎝인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검 끝이 지면을 향하고 있다.
<디지탈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경문(南景文) 묘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산3-8
관리자(연락처)
의령남씨 충경공 종회
南景文(남경문)은 생몰년 미상으로 조선조 개국공신인 의령부원군 南在(1315∼1419)의 아들이다. 본관은 宜寧(의령). 병조의랑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남은 좌의정 忠簡公 智(충간공 지) , 차남은 예문관 직제학, 知司諫院事(지사간원사) 를 지낸 簡(간). 3남은 조선 태종의 4女 정선공주의 남편 昭簡公(소간공)(宜山君(의산군)) 暉(휘) 이다. 일찍 요절하여 약력이 자세하지 않다.
후손 대대로 다수의 名人(명인)을 배출하여 정승이 6명, 대제학 7명, 판서 24명이다. 남경문의 묘를 ‘작은 陵’이라 부른데서 당시 묘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묘역은 태평동 판교-구리간 고속도로와 인접한 의령남씨 선영의 하단에 편동향하여 配淑寧宅主溫陽方氏(배숙령택주온양방씨) 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의 하단 前·左·右 3면에는 높이 40㎝, 너비 170㎝ 가량의 화강암제 장대석을 둘렀으며, 후면에는 활개를 대신하여 150㎝의 거리를 두고 높이 26㎝, 너비 240㎝ 가량의 화강암제 장대석을 2단으로 사모지붕 모양으로 두른 특이한 형태이다. 봉분의 크기는 前 8.7m, 左右(좌우)8.9m, 높이 2.3m로 상부는 평평하며, 前方後圓(전방후원)의 형태를 하고 있는 高麗 墓制(고려 묘제)의 양식이다.
묘역에는 봉분의 前面(전면)에 혼유석 1기·상석 2기·향로석 1기와 상석 좌우에 장명등 각 1기 및 봉분 좌우로 文武人石 각 2기 등 다수의 석물을 배치하여 놓았다. 이외에 장명등은 최근까지 있었으나, 도난으로 인해 옛 석물은 봉분 좌우에 배치된 문무인석 각 2기뿐이다. 또한 묘역에는 흔히 갖추고 있어야 할 망주석이 없다. 봉분의 우측에는 편동향하여 백색화강암제의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8작지붕 옥개석을 갖추고 1975년 宜寧南氏議郞公派宗中(의령남씨의랑공파종중)에서 건립한 墓碣(묘갈)이 있다.
봉분 좌우에는 각 2기씩 문무인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고려조의 衣制史 硏究(의제사 연구) 에 귀중한 자료이다. 좌측 봉분쪽의 문인석은 높이 158㎝, 얼굴부분 52㎝로 3등신의 신체비율이다. 턱이 뾰족하며, 마모로 인해 눈 코 입 등은 윤곽만 확인된다. 또한 머리에 쓰고 있는 官帽(관모)가 특이하다. 두 손을 마주잡고 笏(홀)을 든 모습이 마모로 인해 뚜렷하지 않고, 兩手(양수)는 왜소하게 표현되었다.
문인석 앞의 무인석은 높이 158㎝, 얼굴부분 54㎝로 3등신의 신체비율이다. 큰 눈과 코 및 안면 볼의 윤곽이 뚜렷하며, 턱 밑 턱수염의 표현이 희미하게 확인된다. 또한 두 손은 腹部(복부) 에서 총 길이 68㎝인 검의 손잡이를 잡고 검끝이 지면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측 봉분쪽의 문인석은 높이 168㎝, 얼굴부분 50㎝로 얼굴이 길쭉한 모습이며, 좌측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마모로 눈·코·입 등은 윤곽만 확인된다. 문인석 앞의 무인석은 높이 170㎝, 얼굴부분 54㎝로 좌측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이다.
봉분 우측의 墓碣(묘갈)은 烏石(비석)의 비신 4면에 비문이 있으며, 前面(전면)에 종3열로 ‘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行奉正大夫兵曹議郞宜寧南公諱景文之墓 淑寧宅主溫陽方氏合葬(증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행봉정대부병조의랑의령남공휘경문지묘 숙령택주온양방씨합장) ’의 비문이 있다. 墓碣銘記(묘갈명기)에 舊碣(구갈)이 왜소하고 훼손되어 1975년 宜寧南氏議郞公派宗中(의령남씨의랑공파종중) 에서 新墓碣(신묘갈) 을 건립하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으며, 비문은 후손 升祐·慶祐(승우·경우) 등이 撰(찬)하고, 鳳祐(봉우)가 書(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묘역 입구에 있는 재실..
▼ 묘역 앞쪽의 신도비... 왼편 윗쪽으로 묘가 보인다.
▼ 남경문 신도비와 묘역
▼ 남경문 묘역
▼ 남경문 묘 전경
▼ 남경문 묘 석물... 뒷쪽으로 청룡자락을 연결한 터널이 보인다.
▼ 남경문 묘 백호쪽 석물... 뒷쪽으로 백호자락이 보인다.
▼ 남경문 묘비...
▼ 남경문 묘 측경...
▼ 남경문 묘 백호.. 아랫쪽으로 백호자락을 연결하는 터널이 보인다.
▼ 남경문 묘 청룡쪽 후경
▼ 남경문 묘 백호쪽 후경
▼ 남경문 묘 후경
▼ 남경문 묘 후경
▼ 남경문 묘 윗쪽으로 후손들 묘가 있으나 이 윗쪽으로는 진입할 수 없다하여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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