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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7]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2. 18. 10:00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가인 김병로선생은 일제시대를 겪으면서도 친일행위를 하지않은 몇 안되는 인사 중 한 분이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더 이름을 날렸고 이승만과 대립각을 이루면서 사법권독립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시다.
이곳 묘역은 이준열사 묘역의 청룡쪽 지척에 있는데 묘역을 가려면 이준열사 묘역을 완전히 내려왔다가
다시금 묘역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답사객들은 이준열사 묘에서 개울을 가로질러 김병로선생
묘역으로 오르곤 한다. 일명 담치기를 하는 셈인데 차라리 이곳에 길을 만들어주면 답사하는데 매우
편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준열사 묘역 또한 등산로 윗쪽에도 길을
만들어서 등산한 뒤에 내려오면서 묘역을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처럼
묘역의 홍살문부터 순서에 입각하여 참배하라고 철망을 두른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대다수의 등산객들은
이준열사 묘역을 참배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너무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묘역이라는 곳은 음기가 충만한 곳이라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자주
찾아가고 참배해야 양기운이 어느 정도 감돌게 된다.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곳이다.
다른 묘역들은 철조망이 없어서 등산한 후에 하산할 때 한두번쯤은 들러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이준열사 묘는 최근에 무너진 철조망까지 제거하고 새것으로 갈아 이제는 개구멍도 없어진 상태다.
김병로선생 묘역은 윗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어서 관심있는 사람들은 묘역을 참배할 수 있다.
김병로(金炳魯)
1887(고종 24)∼1964. 법조인·정치가.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街人). 아버지는 사간원정언상희(相熹)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이다.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지 시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관련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항일운동가들의 변호를 자처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2대 대법원장으로 재직했다.
유년시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에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그 해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경성지방법원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허헌(許憲)·김용무(金用茂)·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그가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정의부·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시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승만(李承晩)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6·25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문화재 지정 예고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서울시 강북구 수유4동 산127-1 울산김씨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위치 (지도#7번)
7 김병로 전북 순창(1887~1964) ․항일변호사단체 창설,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맡아 무죄임을 투쟁․48~57 초대 대법원장 이준 묘 청룡쪽,입구로 나와서 다시 진입 ▼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전체보기
▼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2)-아카데미하우스, 4.19묘역 일대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비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비 후면,측면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비 측면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안내판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전경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정면...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단촐하다..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석물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측경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입수도두...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후경
▼ 가인 김병로(金炳魯)선생 묘 후경 및 청룡,백호자락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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