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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5]해공 신익희(申翼熙)선생, 신하균(申河均)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2. 14. 10:00

    해공 신익희(申翼熙)선생, 신하균(申河均) 묘

     

    해공 신익희선생과 신하균선생은 부자지간으로 한 묘역에 같이 있다. 그래서 같이 소개하고는 있지만

    강북구의 순국선열 묘 소개에서나 다른 문헌들에서는 엄연히 따로따로 나와있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개인

    취향에 의해서 하나로 묶어 올리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불편한 분이 계시면 이해바랍니다.

    묘역은 신익희선생 묘만 안내되어 있고 묘역으로 올라가야 신하균선생의 묘를 볼 수 있다. 그러니 신익희

    선생 묘만 찾으면 된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었으나 후보 기간중에 사망하여

    큰 아쉬움을 남기신 분이다. 일전에 신익희선생 생가와 조상 묘를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두군데 모두 풍수적

    결함이 발견되었다. 생가는 앞 안산이 험석으로 갈라져 있어서 좋은 기운을 주지 못하였고, 조상 묘에는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입수도두를 훼손하여 구덩이를 파고 단맥을 시도한 흔적이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선거 유세기간 중 사망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묘역은 아카데미하우스 탐방지원센터 바로 윗쪽에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신익희(申翼熙)
    1894(고종 31)∼1956.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이명으로는 임방호(壬邦乎)를 사용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 조선시대 때의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역임했고, 귀국 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3년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인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T.W.)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일본유학생친목단체인 유일학회친목회(留日學會親睦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력은 저항군에 있다는 믿음 아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편성되자 신익희는 인공 내각의 체신부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당시 신익희는 귀국 후,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였다. 그 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 국회의장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 동안 그는 3선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한테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5년 장면(張勉)·조병옥(趙炳玉)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였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 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신하균(申河均)
    1918∼1975. 정치인·서예가.
    경기도 광주 출생. 건국 초 국회의장을 지낸 익희(翼熙)의 장남이다. 1941년 중국 상해 광화대학(光華大學) 상과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중인 1941년 중국 국민정부 감찰원위임관을 비롯하여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少校服務員:소령급문관), 중앙은행 과원조장(科員組長), 중앙신탁국조장(中央信託局組長) 등 여러 직책을 가졌다.
    전쟁 말기에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전지공작·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뒤늦게 중국에서 귀국하자 한때 한국연건기업(韓國聯建企業) 사장으로 사업계에 투신하기도 하고, 1955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 강사로도 있었다. 그의 정계진출은 아버지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서 선거유세차 전주로 내려가던 호남선열차 안에서 사망한 뒤부터였다.
    당시 국회의원이기도 한 선친의 뒤를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제3대 국회진출의 첫발을 내디딘 데 이어 4·19혁명 뒤인 1960년의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그 뒤 민주당 분당과 함께 민주당 구파인 신민당(新民黨)에 들어갔으며 5·16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의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지난날의 민주당 구파가 주류를 이룬 민정당(民政黨)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는 민정당 경기도당위원장에 이어 통합야당인 민중당 정치훈련원장을 지냈다. 광주 유권자들은 1948년 신익희의 제헌의원선거 무투표당선으로부터 1967년의 제6대 국회 임기 말에 이르기까지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自由黨)의 최인규(崔仁圭) 외에는 줄곧 신씨 부자(申氏父子)에게 표를 던진 셈이 된다.
    그는 3선의원일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났다.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는 한국 최초로 중국고대의 해서체(楷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한 데 이어 몇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듯이, 그는 1960년대 중반 관훈동의 민중당중앙당사 간판에 그의 필적을 남겼다. 1977년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문화재 지정 예고(신익희 묘)
       해공 신익희(申翼熙)선생, 신하균(申河均) 묘
       서울시 강북구 수유4동 산74-3
       평산신씨


     

     

     

     

     

     

     

     

      

    ▼ 춘헌 이명룡(李明龍)선생 묘 위치 (지도#5번)    

    5

    신익희  경기 광주(1892~1956)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국민대학장, 자유신문사 사장․제헌의원, 야당 대통령 후보 아카데미탐방터 지나 위치

    신하균  경기 광주(1915~1975)

     ․1923 상해 독립운동 가담․1941 광복군 총사령부 정위로 활동

    신익희 장남

    부친 신익희 묘 옆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총괄) 바로가기

    ▼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 전체보기  

    ▼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2)-아카데미하우스, 4.19묘역 일대

    ▼ 아카데미 탐방지원센터 바로 윗쪽에 해공 신익희선생 묘소 입구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 해공 신익희선생 묘소 안내판.

    ▼ 해공 신익희선생 묘소 입구

    ▼ 해공 신익희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진 4.19혁명 사적비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원경

    ▼ 해공 신익희선생 묘소 입구의 호랑이상.. 이 시기에는 묘 입구에 맹호상을 세우는게 유행인 것 같다.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전경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장명등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석물...

    ▼ 해공 신익희선생 묘...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이끼가 많이 보인다.

    ▼ 해공 신익희선생 묘비.. 아들 신하균선생이 썼다.

    ▼ 해공 신익희선생 묘비 측,후면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상석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측면.. 석물...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측경

    ▼ 해공 신익희선생 묘 입수도두...

    ▼ 해공 신익희선생 묘 후경

     

    ▼ 해공 신익희선생 장남이신 신하균선생 묘 안내판

    ▼ 신하균선생 묘역 전경... 거의 습지 수준이다..

    ▼ 신하균선생 묘비

    ▼ 신하균선생 묘 측경

    ▼ 해공 신익희선생 재실로 사용하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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