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여주]영의정 홍명하(洪命夏)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3. 7. 10:00
영의정 홍명하(洪命夏)묘
여주 묘지답사를 하면서 영의정 홍명하선생 묘를 보았는데 홍살문이 특이하게 있어서
궁금증이 일었다. 일반묘역에 홍살문이 있는것도 특이한데 모양이 이상했다.
확인해보니 예전에 시멘트로 홍살문을 만들고 곡장도 시멘트로 해놓아서 지금은 아주
보기 흉한 시설물이 되어 있다. 묘역 앞쪽까지 민가가 들어서서 답답한 모습이고
관리도 제대로 안되어 보기 민망할 정도다.
묘역에는 묘비나 어떤 표식도 없는데 묘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최근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묘역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앞이 열려있고 백호가 미약해서 아마도 재물과는
거리가 먼 묘역이라 생각된다.
홍명하(洪命夏)
1608(선조 41)∼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황해도관찰사 춘경(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성민(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서익(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 정언·교리·부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그 뒤 1649년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함에 있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1650년(효종 1) 이조정랑을 거쳐 1652년 동부승지에 승진하였고,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이조와 예조의 참판,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약방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삭직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63년(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망하자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논리를 펴 반격하여 돌려보냈다. 이 일로 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는 또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 등 명신들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순조 때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기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영의정 홍명하(洪命夏)묘 남양홍씨
▼ 홍명하선생 묘역 앞에 세워져 있는 시멘트와 쇠로 된 홍살문...
▼ 홍명하선생 묘역 백호자락에 세워진 신도비.. 묘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 홍명하선생 묘 신도비...
▼ 홍명하선생 묘역은 아주 단촐하다.
▼ 홍명하선생 묘 근경
▼ 홍명하선생 묘 망주석... 곡장은 있는데 문인석이나 장명등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유실된 것 같다.
▼ 홍명하선생 묘 곡장... 곡장을 시멘트로 해놔서 보기 별로 안좋다.
▼ 홍명하선생 묘 곡장... 곡장을 덮은 지붕돌이 수기를 잔뜩 뿜고있다.
▼ 홍명하선생 묘 입수도두..
▼ 홍명하선생 묘 후경.. 앞쪽 명당이 예전에는 청룡이 본신안산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휑하다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기 고양]영의정 이상황(李相璜)묘 (0) 2013.03.11 [경기 여주]천도교제2대교조 해월신사 최시형(崔時亨)묘 (0) 2013.03.08 [서울 도봉]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 묘(세종4남 임영대군 장남) (0) 2013.03.06 [경기 양평]박갱(朴賡) 묘(정종 서1녀 함양옹주 부군) (0) 2013.03.04 [서울 도봉]유양(柳壤)-영의정 유순정 부친, 유첨정-유순정 큰형, 좌의정 유부 묘 (0) 2013.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