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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표석](종로78)승문원 터(承文院址)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2. 5. 12:30
표 석 명
승문원 터(承文院址)
임시관리번호
종로78
설치연도
2000
표석문안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의 터. 조선 건국 초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로 설치되었다가 1410년(태종10)에 승문원으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이곳 양덕방(陽德坊)에 있었으나 1443년(세종25) 이후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으로 옮겨 다니다가 1787년(정조11)에 이르러 다시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계동 140-2
찾아가는 길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40m 현대 좌회전-->200m 현대주차장 입구, 서울북촌문화센터 건너편
관계되는 내용
승문원(承文院)
조선시대 외교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던 관청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과 함께 삼관(三館)으로 불렀다. 조선건국 이후 외교문서 작성을 위해 고려시기의 제도를 계승하여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를 두었다가 1411년(태종 11)에 이를 승문원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승문원에는 의정(議政)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3명,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은 제조(提調)와 부제조(副提調), 정3품 당하관 판교(判校) 1명, 종3품의 참교(參校) 2명, 종4품의 교감(校勘) 1명, 종5품의 교리(校理) 1명, 정6품의 교검(校檢) 1명, 정7품의 박사(博士) 2명, 정8품의 저작(著作) 2명, 정9품의 정자(正字) 2명, 종9품의 부정자(副正字) 2명이 있었으며,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이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에 승문원의 관원은 모두 문관(文官)을 임명하였고, 승문원의 장관인 판교는 임기가 끝나면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는 우대 규정을 두었다.
승문원에서는 중국과 관련한 사대문서와 일본․여진 등과 관련한 교린문서를 작성하였으며, 사대문서 작성에 필요한 이문(중국과의 외교문서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한문 문체)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외교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만큼 문과 급제자를 삼관에 나누어 배치할 때에도 가장 우수한 자를 승문원에 우선적으로 배치하였다.
승문원은 북부(北部) 양덕방(陽德坊) 지금의 종로구 계동 140번지에 있었는데 1443년(세종 25)에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이후 경희궁, 창덕궁으로 옮겨졌다가 1787년(정조 11)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승문원 터(承文院址) 표석
▼ 승문원 터(承文院址) 표석
▼ 승문원 터(承文院址) 표석
▼ 승문원 터(承文院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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