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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중구)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5. 1. 27. 10:00
서울의 중구는 종로구와 더불어 문화유산이 많은 자치단체다.
청계천 남쪽에 위치한 중구는 좌로는 황학동, 신당동, 약수동에서
우로는 정동, 만리동, 서울역에 이르는 한양성곽 안의 남쪽 지역이다.
이곳 역시 종로구처럼 기념표석이 많은데 대부분 가까운 곳에 있어
답사하기에는 수월한 곳이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의 관리번호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서울시에서도 특별히 관리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자료를 편리하게 관리하려는 뜻에서 임으로 임시관리번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이점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표석의 위치를 표기하지 못하였는데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각 표석의 위치를 상세하게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하는 순서는 관리번호와는 상관없이 추후에 별도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중구)
임시번호
자치
구별설치
연도표 석 명
표 석 문 안
중구1
중 구
1996
3·1독립운동기념터 3·1독립만세 시위대가 일제 헌병경찰과 격돌하여 200여명의 부상자를 낸 곳 중구2
중 구
2001
교서관 터(校書館址) 교서관은 조선시대 서적의 인쇄,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도장 등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교서관은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국가에서 필요한 서적을 만들기 위하여 금속활자인계미자(1403) 등 여러 가지 활자를 주조하였다. 교서관은 정조 5년(1781)에 돈화문 밖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중구3
중 구
1993
국사당 터(國師堂址) 조선 태조 4년 12월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 불러오다가 1925년 종로구 무악동으로 옮김 중구4
중 구
2001
진고개 조선시대에 남산골이었던 이 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였지만 진흙이어서 비만 왔다하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질 정도로 통행이 곤란하여 진고개 또는 이현(泥峴)이라 불리었다 중구5
중 구
1995
김익상 의사 의거 터 (金益相義士義擧址) 1921년 9월 12일 의열단(義烈團)의 김익상이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곳 중구6
중 구
1999
이재명의사 의거 터 (李在明義士義擧址)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중구7
중 구
1996
영희전 터(永禧殿址)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의 생가 터로서 숙종 때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셨던 곳 중구8
중 구
2002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은 1910년 건영·석영·철영·호영 등 나머지 4형제와 함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중구9
중 구
2002
양향청 터(糧餉廳址) 양향청은 훈련도감에서 사용하는 의복이나 무기, 비품 등의 물자를 조달하고, 재정을 관리 운영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선조 26년(1593)에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 중구10
중 구
2001
상진집 터(尙震家址) 상진(1493-1564)은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나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5년 동안 국정을 담당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였으며 덕성과 도량이 넓었다. 중구11
중 구
1993
칠패시장 터(七牌市場지) 조선시대 후기 어물(魚物) 등을 사고 팔던 시장 터 중구12
중 구
2001
팔홍문 터(八紅門址) 팔홍문은 조선 선조~인조 때 사람인 이지남과 그 부인 등 3대에 걸쳐 8명이 충신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8개의 문이다. 이지남과 그의 아들 기직·기설은 효자, 그의 딸은 효녀 기설의 두 아들 돈오·돈서는 충신, 이지남의 아내 정씨와 손자 돈오의 아내 김씨는 열녀로 각각 국가에서 이 문을 받았다. 중구13
중 구
2000
3․1독립운동기념터 1919년 3·1운동 당시 시민, 학생 수천명이 모여 제2차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했던 곳. 중구14
중 구
1998
남지터 南池址 서울 도성(都城)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 중구15
중 구
1993
3․1독립운동기념터; 세브란스병원 (獨立運動紀念址) 1919년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논의하던 곳. 중구16
중 구
1988
이덕형선생집터 (李德馨先生家址) 한성부판윤과 영의정을 지낸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선생 집 터. 중구17
중 구
2008
김장생, 김집선생 생가 터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이 태어나신 곳이다. 중구18
중 구
1999
강희맹집 터(姜希孟家址) 조선 초기 서화에 능한 명신(名臣)인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거처하던 집터 중구19
중 구
2001
이문 터 里門址 이문은 조선 전기에 화재와 도둑을 막기 위해 서울의 각 마을 입구에 설치했던 일종의 방범초소라 할 수 있다. 세조 때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운영되었던 이문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방치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동대문구의 이문동이라는 동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구20
중 구
2000
이충순(李忠純) 자결터 구한국군 시위대 참위 이충순(李忠純 1877-1907)이 군대 강제해산에 저항, 서소문에서 대일(對日)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히 자결 순국한 곳. 중구21
중 구
1995
무교 터(武橋址) 조선시대 청계천의 지류인 정릉동천(貞陵洞川)에 놓인 무교가 있던 곳. 군용 물품을 관리하던 군기시(軍器寺)가 옆에 있어 군기시교 혹은 군기시전교라고 하였는데 조선후기에는 흔히 무교로 불렸다. 중구22
중 구
2001
저경궁 터(儲慶宮址) 이 자리는 본디 朝鮮(조선) 제 16대 임금 仁祖(인조)의 潛邸(잠저)인 松峴宮(송현궁)터로서 宣祖(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仁祖(인조)의 生父(생부)인 定遠君(정원군)이 살았던 곳이다. 그후 1755년 英祖(영조)31년 定遠君(정원군)의 生母(생모)인 仁嬪金氏(인빈김씨)의 位牌(위패)를 여기에 모시면서 儲慶宮(저경궁)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 下馬碑(하마비)가 세워졌다. 중구23
중 구
1986
전환국 터(典圜局址) 고종 22년(1885)~광무 2년(1898) 근대식 백동전(白銅錢)을 찍어 만들던 관아 자리 중구24
중 구
1993
정미의병 발원터 丁未義兵發源地 1907년 군대 해산령에 분격, 朴昇煥 대대장이 자살하자 한국 군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의병투쟁을 격화시킨 곳. 중구25
중 구
1988
이황 집터 (李滉家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살던 집터. 중구26
중 구
1995
大韓民國臨時政府 서울聯通府址 이곳은 서울 시청과 비슷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서울聯通府가 자리잡고 있었던 터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月13日 中國 上海에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연통부와 交通局을 은밀히 조직하여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그 중 서울연통부는 日帝와 싸우면서 臨政이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 안의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정에 보고전달하였다. 그러나 1922年頃 서울연통부의 활동은 일제에 의해서 저지됨으로써 주춤해졌다. 이곳 巡和洞5번지는원래 조선조 숙종대왕비 인현왕후가 탄생한곳으로 1897年에 설립된 민족 기업인 同和藥房이 들어섰다가 1930年에는 同和藥品工業株式會社의 자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는 동화약방 설립자의 아들인 閔糧이었는데 독립운동중 그가 日警에 체포되면서 연통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중구27
중 구
1995
부민관 폭파 의거 터 (府民館爆破義擧지)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趙文紀), 류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이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중구28
중 구
1985
독립신문사터(獨立新聞社址) 고종(高宗) 33년(1896) 우리나라 첫 민간 신문사를 세우다. 중구29
중 구
1991
군기시 터 軍器寺 址 조선시대 병기(兵器), 깃발 등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 자리 중구30
중 구
1989
서학당 터(西學堂址) 이곳 서부 여경방(西部 餘慶坊)에 있던 조선시대 한성 4학당의 하나인 서학당 터 중구31
중 구
2001
어서각 터(御書閣址) 어서각은 최규서(최규서 1650-1736)의 집터 안에 있던 영조의 어필을 봉안하던 곳이다. 조선 숙종,경종때 우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을 평정한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을 내렸다. 중구32
중 구
1986
선혜청 터(宣惠廳址) 선조 41년(1608)~고종 31년(1894) 공물세 대신 대동미(大同米)와 포전(布錢)을 받아들이던 관아 자리 중구33
중 구
1985
소덕문터 昭德門址 서울의 서소문(西小門)으로 태조(太祖) 5년(1396) 세우다. 예종(睿宗) 때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고 1914년 일제(日帝)가 철거(撤去)하였다. 중구34
중 구
1996
손탁호텔 터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孫鐸, Miss Sontag)이 호텔을 건립,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던 곳 중구35
중 구
1988
태평관 터(太平館址) 태평관은 조선 전기에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숙소이다. 중앙에 전(殿)이 있고 전의 동서쪽으로 행랑채가 있었으며 전의 뒤쪽으로는 누각이 있었다. 중종 때의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선조 때의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중구36
중 구
2001
예빈시 터(禮賓寺址) 예빈시는 조선시대 국가의 손님을 대접하고 왕의 종친들과 재상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관청이다. 조선조 태조 이래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될 때까지 예빈시라는 이름은 계속 남았다. 예빈시는 처음에 광화문 앞에 설치되었다가 후에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중구37
중 구
2001
수렛골 이곳 서소문동 서북쪽 전 배재고교 자리와 이화여고 부지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수렛골 또는 차동(車洞)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 마을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데서 연유한 것이다. 수렛골은 영조가 인현왕후 탄생지인 이 지역에 인현왕후 추보비를 세워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다. 중구38
중 구
2002
순청 터(巡廳址) 순청은 야간 순찰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야간 순찰은 오후 10시경부터 오전 4시경까지 실시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1465년 세조 때 좌순청과 우순청을 두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內務衙門) 산하의 경무청 소관으로 바뀌었다. 중구39
중 구
2002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시위병영 터는 조선 후기에 임금의 호위를 위하여 조직된 시위대의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전투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산되었다. 시위대의 해산은 군인들의 항일시위투쟁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중구40
중 구
1999
관립법어학교 터 (官立法語學校址) 개항기 프랑스어(法語)를 가르치던 학교가 있던 곳(1895~1910) 중구41
중 구
2000
고운담골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 갔을 때 여인을 도와준 일로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중구42
중 구
1987
혜민서 터(惠民署址) 조선시대 서민 진료, 의약 관리, 의녀 (醫女) 교습 등을 담당한 국립의료기관인 혜민서가 있던 곳. 1446(세조12)년에 설치되어 1882(고종19)년에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주변에 민간 약재상과 약국이 모여 있었다. 중구43
중 구
2001
구리개 仇里介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구리개라고 하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었다. 구리개라는 이름은 황토로 된 이 고개가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혜민서, 장악원, 훈련원 등의 관청이 있었고, 시장 거리의 가게를 중심으로 가내 수공업이 성하였다. 중구44
중 구
1988
윤선도집터 尹善道家址 Site of Yun Seondo's House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이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라고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중구45
중 구
1986
장악원 터(掌樂院址) 음악의 편찬 교육 행정을 맡았던 조선왕조 관아 자리 중구46
중 구
2004
은성주점 터(銀星酒店址) 이 곳에서 약 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1915~1983)와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이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하여 '명동시장(明洞市長)·명동백작(明洞佰爵)'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중구47
중 구
1998
한성부 남부 관아 터 (漢城府南部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남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 중구48
중 구
1985
조선광문회 터(朝鮮光文會址) 조선광문회는 1910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단체로 신문화(新文化)의 요람이자 나라를 잃은 지식인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곳이다. 육당은 이곳에서 '삼국사기''동국통감'등 많은 고전을 간행하고, '붉은저고리''아이들 보이''청춘(靑春)'등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또한 1919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파란 2층 목조의 조선광문회 건물은 1969년 도로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중구49
중 구
2002
도화서 터(圖畵署址) 도화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화가를 양성하고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여 우리 나라의 전통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중구50
중 구
1994
나석주(羅錫疇) 의사 의거 기념 터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투탄(投彈)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 중구51
중 구
2002
남별영터·남소영터 南別營址·南小營址 남별영과 남소영은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 후기의 군사주둔지이다. 남별영은 금위영,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으로 각각 설치되었다. 남별영의 남쪽과 남소영의 북쪽에는 큰 군수창고가 있었다. 중구52
중 구
1986
균역청 터(均役廳址) 영조 26년(1750) 창설, 징병면역세 등을 받아드리던 관아자리 중구53
중 구
1989
유성룡집 터(柳成龍家址) 이곳 남부 낙선방(南部 樂善坊) 먹절골(墨寺洞)은 임진왜란때의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선생이 살던 곳 중구54
중 구
1989
남학당 터(南學堂址) 이곳 남부 성명방(南部 誠明坊)에 있던 조선시대 한성 4부학당의 하나인 남학당 터 중구55
중 구
1988
주자소 터(鑄字所址) 이곳 주자동은 태종 3년(1403)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금속활자를 부어 만들던 곳 중구56
중 구
1993
노인정 터(老人亭址) 조선조말(1840년 건립) 풍양 조씨(豊壤趙氏)의 정자 터로 갑오개혁을 논의했던 곳 중구57
중 구
1985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忠武公李舜臣生家址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한산도 등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었다. 선조31년(1598) 노량에서 전사하였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시조와 한시 등을 많이 남겼다. 중구58
중 구
1988
동평관 터(東平館址) 조선시대에 일본사신이 머물던 곳 중구59
중 구
1996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이 언저리는 조선초에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양성지가 살던 곳 중구60
중 구
2003
국도극장 터(國都劇場址) 국도극장은 1936년 11월에 동양풍(東洋風)을 가미한 르네상스식의 황금좌(黃金座)로 개관하였다. 한국 영화 80년과 운명을 함께 해 온 이 극장은 1948년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 '춘향전' '미워도 다시 한번' 등 한국영화 상영의 중심지로서 영화인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99년 10월 30일에 철거되었다. 중구61
중 구
2003
박팽년집터 朴彭年家址 조선 세종 때 한글 창제에 공을 세운 집현전 학사로 유명하였던 박팽년(1417~1456)이 살던 집터. 세종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이래 형조참판까지 올랐다. 경술(經術))·문장과 필법이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얻은 선비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던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분이다. 중구62
중 구
2003
한국통감부․조선 총독부 터(韓國統監府․朝鮮總督府址) 일제가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에 설치한 한국통감부 터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이 통감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공작을 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통감부 청사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926년에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였다. 중구63
중 구
2004
읍백당 터 挹白堂址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영의정 박승종(1562~1623)과 성균관 교리를 지낸 그의 차남 읍백당 자응(自凝)이 살던 집 터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이던 장남 자흥(自興)의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중구64
중 구
2002
서대문정거장 터 西大門停車場 址 서대문정거장은 경인선 개통 당시의 시발역 이었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 되었고,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서울~인천 전구간이 개통 되었다. 중구65
중 구
2003
동양극장 터(東洋劇場址)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세운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신파극을 공연하였다. 이 극장은 당시 대중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호화선'과 '청춘좌'는 이 극장을 대표하는 2대 극단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연극이 공연될 때는 많은 장안 기생들이 모여 들었다고 하며, 광복 후 운영난으로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에 완전 폐관되고 1995년에 철거되었다. 중구66
중 구
2001
쌍회정터 雙檜亭址 쌍회정은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이항복(1556-1618)의 집 앞에 지어진 정자이다. 수려한 자연 경관을 자랑하던 이곳은 이항복이 전나무 두 그루를 심으면서 절경이라고 널리 소문이 났다. 그 후 이 집의 새 주인이 전나무 앞에 정자를 지어 쌍회정이라 하였다. 중구67
중 구
1998
장충단 터(奬忠壇址)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광무(光武) 4년(1900) 설치했던 제단터(祭壇址) 중구68
중 구
2001
정광필집 터(鄭光弼家址) 정광필(1462-1538)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이곳은 정광필 후손까지 도합 12명이 정승 반열에 올라 속칭 '정씨터'라고 불리고 있으며, 선조 때 좌의정 정유길의 외손자인 김상용·상헌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고종 때 정원용이 이 집을 호화롭게 가꾸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중구69
중 구
1985
남소문 터(南小門址) 서울의 소문(小門)으로 세조(世祖) 때 세우다. 예종원년(睿宗元年 1469), 음양설(陰陽說)에 따라 철거, 그후 일제(日帝)시대 주초(柱礎)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중구70
중 구
2001
풀무재(冶峴) 풀무재는 중구 묵정동에서 쌍림동을 거쳐 충무로5가 충무초등학교 북쪽에 있었던 고개이다. 고개 언저리에 대장간들이 늘어서 있어서 풀무재 혹은 대장고개라 불렀고 한자로는 야현(冶峴)이라 하였다. 이 야현은 장충동 2가, 묵정동, 충무로5가 일대의 옛 이름인 야현동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중구71
중 구
1998
한성부 서부 관아 터 (漢城府西部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서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 중구72
중 구
2001
회동서관 터(匯東書館址) 회동서관은 1897년 고유상(高裕相)이 설립하여 일제 때까지 존속했던 출판사 겸 서점이다. 회동서관은 서적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 일체를 취급했다. 또 출판도 병행하여 초창기에는 신소설을, 나중에는 사전과 실용서 특히 산업발달에 필요한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중구73
중 구
2006
가산 터 假山 址 청계천을 준설(浚渫)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가산이 있었던 터. 영조 36년(1760)과 순조 33년(1833)에 대규모의 준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청계천 주변 여러 곳에 가산이 만들어졌다. 중구74
중 구
2005
염초청(焰硝廳) 터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이 관아는 임진왜란 때 설치되어 고종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하여 전시에 대비했다. 중구75
중 구
1986
훈련원 터(訓練院址) 태조 1년(1392)~고종 31년(1894) 군사의 무예훈련 방법교습 및 무과 과거시험 등을 맡아보던 관아 자리 '여행등산 > 기념표석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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