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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여주]명성황후 생가 답사(복지센타 어르신들과 함께...)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5. 4. 15. 10:00

    여주답사는 영릉에서 시작하여 녕릉, 신륵사를 거쳐 명성황후 생가에서 마감하곤 한다.

    명성황후 생가가 고속도로 옆에 있어서 서울에 돌아오기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적 스토리 순서로 봐도 맨 나중에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다.

    명성황후 생가답사는 윗쪽의 감고당부터 해야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감고당(感古堂)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37번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년(숙종 13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일부 시설물이 옮겨졌고, 간판 역시 여주의 민유중 묘막에 옮겨졌다.

     

    ▼ 감고당(感古堂)은 숙종 때 인현왕후 생가에 있던 건물인데 파란만장한 사연을 안고 이곳에 있다.

    ▼ 감고당(感古堂) 입구

    ▼ 감고당(感古堂) 안채에 잠깐 앉아서...

    ▼ 감고당(感古堂)은 수유리 덕성여대를 거쳐 이곳으로 옮겨왔다.

    ▼ 감고당(感古堂) 옆에 있는 소원바위... 그 윗쪽에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다.

    ▼ 소원바위에서 소원을 빌고 계시는 회원님들...

    ▼ 감고당(感古堂)이 사대부 건물이면 그 옆에 있는 민중들의 가옥인 초가... 뒷산이 아름답다...

    ▼ 답사를 주관하고 날씨가 흐릴까봐 노심초사를 해주신 전종철 반장님...

    ▼ 70대 중반, 80대 어르신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체력을 갖고 계시다.

    ▼ 명성황후 기념관

    ▼ 고종과 명성황후 상... 

    ▼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건평 30여 평의 목조와즙(木造瓦葺). 이 건물은 본래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1688년(숙종 13)에 처음 축조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는 목조 와가 14칸과 맛배지붕 1동과 부속건물 1동만이 남아 있다.

    대문인 일주문은 정면 245㎝에 측면 150㎝의 박공건물(朴工建物)이다. 건물 본체에는 안방과 부엌채만 있으며, 명성황후가 공부했다는 방은 없다. 대신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라 쓴 고종의 어필비(御筆碑)가 있다. 이 비는 1904년(광무 8) 5월에 건립되었는데, 비의 높이는 250㎝, 폭은 64㎝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고종 3) 왕비로 책봉(冊封)되었다. 그녀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浪人)에 의해 경복궁(景福宮)에서 무참하게 피살되었다.

    생가 뒤에는 명성황후 6대조인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1985년에는 생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명성황후생가는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의 전통을 보여준다. 

     

     ▼ 명성황후 생가... 뒷쪽의 사격은 토성체로 아미사라고 한다. 이런 사격은 왕비를 낳는다고 알려져 있다.

    ▼ 명성황후 생가 내부

    ▼ 명성황후 생가 안채에 명성황후 상이 전시되어 있다.

    ▼ 명성황후 탄봉구리비...

     

    민유중(閔維重)

     

     1630(인조 8)∼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여준(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대사헌 기중(蓍重)과 좌의정 정중(鼎重)의 동생이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 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여주 섬락리에 안장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 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숙종의 국구이자 인현왕후 생부인 민유중 신도비

    ▼ 민유중의 묘 원경... 아미사의 끝에 묘를 썼다. 

    ▼ 민유중 묘를 오르면서 바라본 명성황후 생가... 이곳은 민유중의 묘막으로 처음 지어졌다.  

    ▼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손으로 묘지기를 하며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낳았다. 

    ▼ 민유중의 묘 

    ▼ 민유중의 묘... 전순이 없어서 앞쪽에서 사진촬영은 힘들다.

    ▼ 민유중의 묘에서 감평...

    ▼ 민유중의 묘 석물

     

    ▼ 민유중의 묘갈... 두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 민유중의 묘 입수맥...

    ▼ 민유중의 묘 입수도두

    ▼ 민유중의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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