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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조선왕실 최초의 대원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13. 23:13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덕흥대원군 묘, 흥국사가 내 블로그에 없는 것을 오늘 알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의례 있을 것으로 생각한 묘들이 없을 때는 당황하게 된다. 이번에 마침 흥국사와 덕흥대원군 묘를 다녀와서 글을 올린다.
처음 다녀올 때의 기분으로 글을 올려야 하는데 익숙한 곳을 올리려면 이것 저것 따지게 되어 글이 제대로 안써진다. 사진 위주로 올린다.
덕흥대원군 묘를 처음 방문한 때가 묘지답사를 시작한 때였는데 답사팀들과 함께 찾아갔었다. 언덕 위 과룡지에 쓴 것처럼 보여 당황했는데 엊그제 찾았더니 역시나 그때의 느낌대로 좋은 곳은 못되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아무데도 못나가고 있지만 이참에 여기저기 혼자서 답사지를 선정하고 찾아나서고 있다. 멀리는 부담스러워 가까운 곳 위주로 답사에서 놓친 곳을 세밀하게 찾아보고 있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4월 2일(음력 3월 5일) 궁궐에서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서9남이자, 증(贈)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친형제로는 영양군 이거, 정신옹주가 있다. 처음 이름은 환수(歡壽)였다가 뒤에 초로 개명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덕흥군(德興君)으로 책봉되었다.
1542년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로 지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하였다. 그의 집이었던 도정궁은 처음에 한성부 사직동 근처에 있었다.
1552년 4월 23일 당대의 고관 몇 명과 사대부들과 시비가 붙고, 기생들과도 어울려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554년 3월에는 덕흥군의 집 노비들과 그의 장인인 정세호의 집 노비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으나 역시 명종이 무마시켰다.
1559년(명종 14) 6월 14일(음력 5월 9일)에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그 해 9월 17일에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생전 명종에 의하면 그는 무식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567년(명종 13년)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 후사없이 죽은 명종의 뒤를 이어 조선 14대 왕인 선조로 즉위했다. 중종 이후 외척의 발호에 부정적이었던 신하들은 명종의 하성군 낙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동의하였다.
선조는 즉위 후 번번히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삼사는 선조가 덕흥군의 아들이 아닌 명종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아 즉위했음을 이유로 들어 덕흥군의 추존을 반대하였다. 1569년(선조 2년) 11월 1일에 선조는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고하려면 황백부모(皇伯父母)를 칭하기로 하였다.
그의 아들이며 선조의 형 하원군 정에게는 작위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리고 덕흥대원군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이후 잠저(도정궁) 후원에 가묘(家廟, 덕흥궁)를 세워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수락산에 있다.
선조는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의 묘를 덕릉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순회세자를 잃은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기로 하고 한윤명(韓胤明), 정지연(鄭芝衍) 등을 사부(師傅)로 선정하여 덕흥군의 세 아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다. 한때 윤원형은 그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덕흥군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강권하여 덕흥군이 수락했지만, 명종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 기념물 제55호
문화재명칭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
관리자(연락처)
경기도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입구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진입로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앞쪽인데 중앙에 보이는 신도비는 덕흥대원군 장남 하원군 신도비... 우측으로 진입하면 하원군 묘부터 볼 수 있다.
▼ 문화재 표석 뒤로 보이는 묘는 덕흥대원군 장남 하원군 묘...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안내판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 중앙에 신도비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 묘역을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인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 전순.. 꺾이며 흘러내려가는 것이 부대부인 하동정씨의 증조할아버지 정인지의 묘를 보는 것 같다. 꺾이는 것은 좋게 보지 않는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전경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장명등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표...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백호방 석물... 백호쪽에 묘가 보여서 후손들 묘인가 싶어 가봤다. 전혀 다른 분들 묘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청룡방 석물... 아래쪽 마을이 덕릉마을인데 이곳에 재실이 있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게 있다. 왕으로 추존 하지 못한 한이 있어서 인지 이름도 덕릉이라 칭하고, 일반 묘에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묘역에 무인석을 세워놓았다. 수염이 확연한 무인석... 아마도 문인석은 없앤 것을 보면 문인석 대신에 무인석만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던게 분명하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백호방 무인석... 이는 왕릉에만 존재하는 무인석을 덕흥대원군 묘에 세움으로써 왕릉과 같은 서열로 관리하고 싶어한 선조의 뜻이었을 것이다.
▼ 부대부인 묘 측방이 허물어져 있는데... 이것은 거의 바람의 영향이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측경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후경... 명당이 경도되어 있어서 물이 고이지 못한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입수룡...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백호방에서 바라본 입수맥...
▼ 백호방 민묘에서 바라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
▼ 백호방에서 바라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 1월 23일 ~ 1597년 10월[1])은 조선 중기 왕손(王孫)으로 덕흥대원군의 첫째 아들이며, 제14대 선조(宣祖)의 큰 형이다. 1558년(명종 13)에 하원정(河原正)에 책봉되었고, 1559년(명종 14) 외간(外艱)를 만나 1561년(명종 16)에 복기(服期)를 마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하원군(河原君)에 봉작되었다. 이해 남양인 영의정 홍섬(洪暹)의 딸인 남양군부인 홍씨와 길례를 올렸다. 슬하에 자녀 3남 1녀를 두었다. 남양군부인 홍씨가 죽자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李義老)의 딸인 신안군부인 이씨와 재혼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하였고, 부실 4명에서 6남 5녀를 두었다.
1569년(선조 2)에 사친 내외를 추존하고, 작위 1품에 가자하였다. 선조의 잠저(도정궁)에 가묘(家廟, 덕흥궁)를 세워 봉사(奉祀)하도록 하였다. 1581년(선조 14) 문소전, 연은전, 종부사옹, 시원 등의 총책의 명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을 맞자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갔다. 1593년(선조 26) 상소를 올려 "종실자손 중에서도 유능한 자는 문무 양과에 응시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1596년(선조 29) "왕은 위로는 조종(朝宗)의 위대한 치적을 항상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피나는 정성을 존중하면서 다수의 의견을 좇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97년(선조 30) 가을에는 내전(內殿)이 수안군(遂安郡)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사옹제조로서 따라 갔다. 이해 11월(음력 10월)에 그곳에서 죽어 이듬해 12월 29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기슭 선영 곁에 즉 대원군묘 계하 신좌에 예장하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원종공신2등(扈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고,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추록되었다. 1758년(영조 34) 시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시호는 의헌(懿獻)이라 하였고, 1771년(영조 47) 영조의 명으로 덕흥궁(德興宮)에 신주는 불천지위로 향사되었다. 현재 묘역과 신도비는 덕흥대원군묘에 포함 되어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받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을 진입하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하원군(河原君) 신도비
▼ 하원군(河原君) 신도비
▼ 하원군(河原君) 신도비
▼ 하원군(河原君) 묘 전경
▼ 하원군(河原君) 묘
▼ 하원군(河原君) 묘표
▼ 하원군(河原君) 묘 석물...
▼ 하원군(河原君) 묘역에도 바람길에 놓여있다.
▼ 하원군(河原君) 묘 후경
덕릉재실(德陵齋室) 덕흥사(德興祠)
덕릉재실(德陵齋室)은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조모와 부모 및 백형 내외 분의 불천지위 6위를 모시는 묘당(廟堂)이다. 불천지위 6위는 창빈 안씨(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 덕흥대원군(선조의 사친),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사친),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백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 정배),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 계배) 여섯 분이다.
덕릉재실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수락산방(水落山房)이라고 해서 대원군묘를 관리하던 관원(령, 참봉)이 있던 곳이었다.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어필로 수락산방(水落山房)이라는 편액이 있었다고 한다.
수락산방보다는 덕릉재실로 더 많이 불리며, 덕릉재실을 덕흥사(德興祠)라고도 불린다. 1950년 대 도정궁 및 덕흥궁이 화마 및 도시개발로 없어지면서 덕흥궁에 있던 불천지위 6위를 모시면서 덕흥사(德興祠)라고 불리게 되었다.
덕릉재실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ㄱ"자 가옥으로 '덕흥사(德興祠)’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339번지 덕릉마을 내에 위치해 있다. 덕릉재실 후좌우로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와 역대 도정궁 사손묘(嗣孫墓) 및 대원군 원찰인 흥국사(興國寺)가 자리 잡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 덕릉재실(德陵齋室) 덕흥사(德興祠)에서 바라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
▼ 덕릉재실(德陵齋室) 덕흥사(德興祠) 전경
▼ 덕릉재실(德陵齋室) 덕흥사(德興祠) 재실문... 덕흥대원군파 대종회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 덕릉재실(德陵齋室)에는 덕흥사(德興祠)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덕릉재실(德陵齋室) 덕흥사(德興祠)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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