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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용산]새남터 기념성당
    카테고리 없음 2020. 5. 7. 21:33

    새남터 성당

     

    정말 오래전에 다녀온 곳인데 임시저장을 해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음에서 블로그 체계를 바꾼다고 해서 임시저장을 아마 줄일 생각인듯 보여 부랴부랴 임시저장물을 꺼내 올린다.

    새남터는 용산에서 한강으로 나가는 곳에 있어서 용산답사 때 자주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오래 되어서 감흥을 생각하기 보다는 사진 위주로 사실적인 내용만을 올리니 이해 바란다.


     

    새남터 성당

     

    새남터’는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억새와 나무를 합한 것이 ‘새나무’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부터 이곳에 억새와 나무가 무성했다 한다. 억새와 나무가 무성한 곳, 그래서 새나무터, 새남터가 되었다.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는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는 모두 열 네 분이다. 그런데 이곳 새남터에서 열 한 분의 성직자들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조선천주교회의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순교하신 곳이다. 먼저, 중국교회로부터 조선에 파견되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그리고 ‘기해일기’의 주인공인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조선 초기 새남터는 군사 훈련장이고 국사범(國事犯) 등 대역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여섯 신하의 처형이 부당하다고 상소하기 위해 도성(都城)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지금 노량진 근처에 있는 어떤 고개에서 여섯 신하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였다. 그 때 그 고개를 ‘아차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후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천주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 새남터에 뿌려졌고, 그리하여 찬란한 신앙의 꽃이 한반도에 피어날 수 있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1795년 북경교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는 최초로 이 땅에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다. 한양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6,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신부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자신만 없으면 박해가 그치려니 생각하고 중국 쪽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겪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한다. 주문모 신부는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되었다.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신유년의 박해가 끝나고 30년이 흘렀을 때(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빠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고, 조선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들어왔다. 이 때 신자 수가 9,000 여명으로 증가하였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소년들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1839년 기해년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에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다. 이곳 새남터에서 세 분의 선교사들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대건은 모방 신부님에 의해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두 번이나 중국을 넘나들며 조국에 들어갈 꿈을 꾸었다.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고 그 유명한 라파엘 호에 몸을 싣고 조국을 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5년 10월 12일 익산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이후 조국의 복음화에 힘쓰고 선교사 입국을 모색하는데, 1846년 6월 서해 뱃길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백령도 부근으로 나갔다가 관헌에 체포된다. 수십 차례 문초를 당하면서도 천주님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마침내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신부의 나이 26세였다. 신부가 처형된 후 3일 후 현석문도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철종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 조선천주교회는 평화를 맛 볼 수 있었고, 교세도 크게 확장하였다.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 덕분이었다. 1855년에는 일만 사천여명에 이르고, 신학교도 세울 수 있었다. 철종이 승하(昇遐)하신 후 고종 임금이 즉위하자 상황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 영국이 동맹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물리치자고 대원군에게 제의하였는데, 시기도 놓치고, 오해도 일어나고 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 1866년에 박해가 시작되어 18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 동안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순교하였고,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등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조선시대,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용산 8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저녁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쩌면 이곳 새남터에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피 때문에 이곳 저녁풍광이 그렇게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하늘도 슬픔을 감추지 않고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바로 이곳 새남터에서는 북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1956년 현 용산구 이촌 2동에 ‘가톨릭 순교성지’라고 새긴 현양비(顯揚碑)를 세울 수 있었다.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해서 본당이 설정되었고,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본당과 성지를 담당하고 있다.

    국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다보면 대교 북단 서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층 기와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명지대 건축학 교수로 계신 박태연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1987년에 완공해서 봉헌하였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 앵베르 주교님, 성 모방 신부님, 성 샤스탕 신부님, 성 베르뇌 주교님,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님, 성 볼리외 신부님, 성 도리 신부님,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새남터기념성당 홈페이지 성지역사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성모 순례지)

    문화재명칭

    새남터기념성당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이촌동)

    관리자(연락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 새남터기념성당


    ▼ 새남터기념성당 

     ▼ 새남터기념관

    ▼ 새남터에서 처형된 주문모 신부상 

    ▼ 새남터순교기념성전 머릿돌... 요한바오로2세 교황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 새남터기념성당은 한옥의 형태로 건축되었다. 

    ▼ 예전에 이곳을 지날 때 한옥 건물이 보여서 민속박물관처럼 문화재 박물관인줄 알았는데 새남터기념성당인 것을 답사 때 처음 알았다. 

    ▼ 새남터기념성당 외관 

    ▼ 새남터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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