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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가비교)천안 병천 유관순열사 생가와 조병옥박사 생가 비교
    풍수상담/웰빙실용풍수사례 2020. 8. 5. 23:03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가면 유관순열사 유적지가 있는데 여기를 둘러보고 나오다보면 생가가 바로 옆에 있다고 되어 있어서 그곳을 찾게 된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다보면 인근에 조병옥박사 생가 안내판이 보인다. 계획하고 찾지 않아도 한꺼번에 유명한 두 분의 생가를 동시에 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생가를 보면서 풍수적 잣대로 생가를 분석해보고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어 간략하게 비교하여 올린다..

     

    ▼ 병천면 유관순 열사 유적지, 생가와 조병옥박사 생가 지도 

     

    ▣ 유관순열사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은 흥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각자였으며 민족계몽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뜻이 있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어머니 이소제도 교회를 통해 신앙심과 신지식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유관순도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을 마음에 품은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유관순은 1916년 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인 엘리스 샤프(Elice Shape)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학비를 면제받는 교비생으로 편입했다. 1919년에는 고등부에 진학했다.고등부 1학년이었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 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유관순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1920년 4월, 영친왕의 혼인에 의한 특사로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계속되는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 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유관순은 1920년 19세의 나이로 고문후유증을 겪은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다음백과에서 인용>

     

    ▼ 유관순열사 생가 비문

     

    ▼ 유관순열사 생가 담에서 바라본 생가

     

    ▼ 유관순열사 생가 대문

     

    ▼ 유관순열사 생가 안채... 생가 방에 독립운동 당시 태극기를 제작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 유관순열사 생가 아래채

     

    ▼ 유관순열사 생가 옆에 있는 매봉교회... 유관순열사 가족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 조병옥박사(趙炳玉博士)

     

    조병옥(趙炳玉,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 ~ 1960년 2월 15일 미국)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안창호에게 감화되어 그의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국민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뒤 태평양 전쟁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뒤 미군정의 경찰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 제2대 경찰 통수권자였고 장택상과 더불어 친일경찰들을 재등용한 사람 중 한명이다.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입당, 신익희·윤보선·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으로 미국 워싱턴 D. 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서하였다. 제1공화국 후반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장택상, 이기붕 등과 수시로 만나 회담, 절충을 주도하였으며, 기자들이나 강경투쟁을 요청하는 야당인사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회자화되었다. 본관은 한양,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유석(維石)이다.<위키백과 요약에서 인용>

     

    ▼ 조병옥박사 생가

     

    ▼ 조병옥박사 생가

     

    ▼ 조병옥박사 생가 안채... 다른 집에 다 있는 툇마루가 안보인다.

     

    ▼ 조병옥박사 생가 아래채에 디딜방아도 있다.

     

    ▼ 조병옥박사 생가 전경

     

    ▣ 유관순열사 생가와 조병옥박사 생가 비교

     

    이곳은 금북정맥이 만뢰지맥으로 이어져 이곳에서 분맥을 하는데 유관순열사 생가와 조병옥박사 생가는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맥을 받고 있다. 유관순열사 생가는 

    몽각산-광덕산-동성산-매봉산으로 이어진 맥을 받는 반면에 녹동천을 사이에 두고 조병옥박사 생가는 

    몽각산-서림산-막사산으로 이어진 맥을 받고 있다.

     

    ▼ 금북정맥(만뢰지맥)하에 입지한 유관순열사 생가 및 조병옥박사 생가

     

    ▼ 유관순열사 생가 및 조병옥박사 생가 위치

     

    ▼ 유관순열사 생가 및 조병옥박사 생가 위치

     

    ▼ 유관순열사 생가 

     

    매봉산이 동남방으로 활처럼 휘어진 안쪽에 용두1리가 위치하는데 산 아래에 주택들이 밀집해 들어서 있고 앞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있는 전형적인 마을이다.  또한 녹동천이 환포하여 기운이 모이는 아주 좋은 터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마을 뒤산인 매봉산이 의외로 높아 산에 바짝 붙어있는 주택은 능압이 염려된다. 또한 골이 선명하게 발달되어 골 아래에 위치한 가옥도 살풍이 염려된다. 

    용두리는 마을을 감싸는 산 능선 안쪽에 위치하고 유관순열사 생가는 청룡쪽 끝자락에 위치하는데 산에 바짝 붙어있다. 이런 경우 산의 기운에 눌리게 된다. 산에 눌리게 되면 평탄한 삶이 되지 못하고 힘들어 진다. 지금은 앞쪽으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곳이 편한 기운이 있는 곳으로 보인다. 

     

     

     

    ▼ 조병옥박사 생가 

     

    막사산에서 북서진한 용맥이 조병옥박사 생가 뒤 현무봉으로 이어져 용두3리(송정리)를 감싸고 있다. 앞쪽에 녹동천이 활처럼 휘어져 있어 서향의 좋은 기운이 감도는 마을이다. 

    조병옥박사 생가는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생가를 복원하면서 앞쪽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앞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넉넉한 재물을 제공하고 있어 전형적인 명당 마을이다. 

    산을 등지고 하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전저후고 지형에 위치하여 좋은 기운을 받고 있는데 뒤산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는 곳에 입지하고 있어 능압이 없고 현재의 생가로만 본다면 산이 포근히 감싸주는 산진처에 해당하는 곳이다. 

    다만 뒤쪽에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는데 묘를 언제 만들었냐에 따라 생가의 기운이 달라질 수 있다. 

    지가서『설심부(雪心賦)』에 

    <선택후분(先宅後墳) 분필흥이택필패(墳必興而宅必敗) 선분후택(先墳後宅) 택기성이분자쇠(宅旣盛而墳自衰)라> 하여, 먼저 집을 지어 사람이 살고 있는데, 나중에 집 뒤쪽 능선이나 옆으로 무덤이 들어서면 묘는 흥(興)하지만 집은 패망한다 하였다.오래된 묘역도 보이지만 얼마 안된 묘도 보여서 어떤 기운의 변화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현대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분의 생가가 인접해 있다보니 풍수사로서 지나칠 수 없어 조심스럽게 분석해 본 것이다. 좋은 기운을 받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생활하게 되면 그 기운의 힘을 받아 분명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번 생가 방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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