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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9. 17. 10:00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논개 묘는 함양에 있다. 그러다보니 별도로 찾아가기 전에는 함양 땅을 지척에 두고도 못가보게 된다. 장수까지는 자주 갔었는데 터널 하나만 지나면 되는데 그곳을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 이번에 함양, 산청을 맘먹고 찾은 이유 중 하나다.
답사하는 날 태풍이 불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날씨도 무난했고 더위도 없어서 좋았다. 강의를 할 때 이곳 묘역을 자주 언급하는데 중출맥과 개장을 볼려면 겨울에 앞쪽 안산에서 바라볼 때 제대로 용맥이 보이는데 한 여름이라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고 흔적이라도 찾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의기라고 알려진 논개인데 지역민들의 꾸준한 연구로 지금은 열녀라고 수정되는듯 해서 나도 참고문서를 열녀로 된 위키백과를 인용했다. 들판의 벼들이 벌써 노랗게 변해가는 초가을 날씨와 함께 열녀 논개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논개(論介)
논개(論介, 1574년 9월 3일 ~ 1593년) 또는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 시대의 열녀이다. 충 계내면 대곡리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박朴氏) 사이에서 반가(班家양반)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 일찍이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고 이후 40세가 넘은 나이에서야 딸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에 집에 의탁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의 친가에서 피신하였고, 이에 부호는 1579년 기소하여 모녀를 구금하였다.
이때,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殉節) 하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서는 박종화의 소설 《논개와 계월향》(1962년)에서 최초로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594년 유몽인(柳夢寅)은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게 되는데,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광해군 9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가 관기(官妓)로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순국 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논개의 순국 기록을 1621년 자신이 편찬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남기게 된다.
권1 인륜편(人倫篇) 효열(孝烈)에 논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인륜편에는 효열, 충의, 덕의, 은둔, 혼인, 처첩, 기상, 붕우, 노비, 배우, 창기 등으로 나누어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논개의 이야기는 처첩, 노비, 창기에서 다뤄지지 않고 인륜편에 실려 있다. 《어우야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어우야담》의 이 기록을 근거로 그 동안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로 알려져 왔다.
그 동안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개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남아 있는 기록을 근거로 진주성의 관기(官妓)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논개는 관기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로서 최경회가 목숨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그의 후처가 되었다가 사후 정실 부인으로 승격된 인물이며, 적장을 죽이기 위해 연회장에 잠입할 목적으로 기생으로 위장하였을 뿐인데 이로 인해 논개가 관기로 잘못 알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4]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위키백과에서 인용>최경회(崔慶會)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 출신. 최충(崔冲)의 후손이며, 최혼(崔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범(崔尹範)이고, 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이다. 최경장(崔慶長)의 동생이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 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에 그의 「투강시(投江詩)」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소재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 31번지
관리자(연락처)
경상남도 함양군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용맥도... 잘 갖춰진 국세를 이루고 있는데 내청룡이 감아주지 못하고 흐르는 것과 백호가 안산으로 연결되며 흔적만 남은 것 등은 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청룡, 외백호가 단단히 막아주고 있어 물길 또한 역수로 빠져나가 좋은 기운을 보내준다.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항공사진... 횡룡 중출맥으로 내려와 용호를 잘 펼치고 있다. 안산이 배를 내미는 것은 좋게 보지 않는다.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원경... 수구처에서 바라본 모습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넓은 주차장을 갖추고 있다.
▼ 논개(論介) 사당 의암사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오르는 길 안쪽에 의암논개 반장의병추모비(義岩論介 返葬義兵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제목이 너무 어려워 살펴보니 논개와 최경회장군 시신을 진양(晉陽)벌 지수(智水)목의 남강(南江) 기슭에서 발견한 의병들이 이곳까지 모시고 온 것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 의암논개 반장의병추모비(義岩論介 返葬義兵追慕碑) 뒤면...
의암논개 반장의병추모비(義岩論介 返葬義兵追慕碑)
남강의 시원(始源)인 여기
함양군(含陽郡) 西上面 金塘里 탑시기골에
남강(南江)과 함께 푸르게 흐르는
찬란한 역사(歷史)의 꽃 의암논개(義岩論介) 묘(墓) 있나니.
진주성(晉州城) 무너져 흩어졌던 의병(義兵)들이
진양(晉陽)벌 지수(智水)목의 남강(南江) 기슭에서
이제 막 원수 갚아 햇살같이 웃음 번진
열아홉 청춘(靑春)의 의암논개(義岩論介) 주검 건져
한여름 삼백리(三百里)길 낮에는 왜병(倭兵) 피해
사흘밤 이슬 속에 총총히 반장(返葬)하여
가신 님의 고향(故鄕) 길목 의병(義兵)들의 창의지(倡義地)인
덕유(德裕)의 영봉(靈峯) 아래 양(陽)바르게 묻었구려.
이곳 함양(咸陽)은 천령(天嶺)의 옛 땅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대대(代代)로 살았거니
그 밤 반장(返葬)에 목숨 건 의병(義兵) 선인(先人)들이시어
오늘 이 고을 군민(郡民)들이 비(碑) 하나 세우고
거룩한 충의(忠義)를 삼가 추모(追慕) 하옵나니
민족(民族)의 애인(愛人)으로 영원(永遠)할 의암혼(義岩魂)이
충효(忠孝)와 정절(貞節)의 그때 모습 그대로
천령함곡(天嶺含谷) 터전에서 전(傳)해지게 하소서.
1989. 12 함양군수(咸陽郡守)
<추모비 뒤면에 나와있는 글을 옮겨 적다>▼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전경... 앞쪽이 논개, 뒤쪽이 최경회 묘
▼ 논개(論介) 묘
▼ 논개(論介) 묘 석물
▼ 최경회(崔慶會) 묘 전경
▼ 최경회(崔慶會) 묘 상석... 상석에 묘비명이 기록 되어있다.
▼ 논개(論介) 묘 후경
▼ 최경회(崔慶會) 묘 후경
▼ 논개(論介), 최경회(崔慶會) 묘 측후경
▼ 논개(論介) 영정... 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영정을 정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진주시는 표준영정 원본을 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의기사에 봉안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의기사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 논개'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었으나, 2005년 6월 10일 한 진주 지역 시민단체가 김은호의 친일 행적을 문제삼아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던 논개 영정 사본을 무단으로 뜯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과 순국지인 경남 진주시가 공동으로 표준영정 제작에 합의해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하였으며, 윤여환 교수가 새로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되었다.
▼ 논개(論介) 묘를 가다보면 남강 건너에 탑이 두개 보여 확인해 본 결과 서상면 충혼탑이었다.
▼ 논개(論介)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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