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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1)조식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9. 16. 11:55
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유적지를 찾으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여의치 않아 답사를 못했는데 이번에 맘 먹고 찾았다. 지리산 법계사를 갈 때도 눈 앞에 보고서도 혼자가 아니어서 못갔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남명선생 유적지를 찾고자 산청을 방문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코로나로 인해 기념관은 개방을 하지 않아 못들어가고 묘소, 산천재, 덕천서원을 보고 왔다.
묘소는 풍수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언급해서 유명해 진 곳인데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 다루기가 뭐해서 말을 아끼던 곳이다.
산청 조식선생 유적지는 크게 묘소, 산천재, 기념관, 덕천서원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묘소와 덕천서원,산천재로 나눠 올릴 생각이다. 묘소는 산천재 뒤 산에 있는데 묘소에 오르면 조망이 아주 시원하고 사격이 좋아서 찾는 사람들이 좋아할 국세를 갖췄다. 그러나 묘라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조망을 갖췄다고 좋은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용,혈이다. 맥동기평(脈動氣平)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으로 이 묘역을 가름한다.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
조선 중기의 학자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그의 묘소를 비롯해서 산천재, 별묘, 신도비 및 재실 등이 있으며, 1984년 1월 26일에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조식(曹植, 1501~1572)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南冥)이다. 성리학의 대가로 일생동안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살았다. 이황(李滉), 성수침(成守琛)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 수백 명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인(北人) 세력을 형성하였다.
조식의 유적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유적과 시천면 사리 유적 등 두 곳에 나뉘어 있다. 원리 유적은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 등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창건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 곳이다.
덕천서원은 건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다. 1601년(선조 34)에 다시 세웠고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서원 안에 정면 5칸, 측면 2칸반인 ‘경의당(敬義堂)’이란 이름의 강당이 있다. 뒤편에는 제향공간을 배치하였다. 입구에 삼문을 세웠고, 좌우로 담장을 둘렀다. 삼문 안에는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한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또 서원 남쪽의 냇가에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덕천서원의 유생들이 쉬던 곳으로 1585년(선조 18)에 처음 세워졌다.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리 유적은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별묘(別廟), 조식의 묘소, 신도비 및 재실 등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조식이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1561년(명종 16)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1584년(선조 17)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세워졌다. 부근에는 종가에서 불천위 조식을 모시기 위해 지은 별묘와 재실이 있다.
조식의 묘소에는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의 글을 새긴 묘비와 석물이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두르지 않았고, 뒤에는 자연석을 쌓아올린 곡장이 얕게 둘러져 있다. 망주석은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나, 상석은 근래의 것이다. 봉분 옆 묘갈명은 한글로 번역해서 새긴 최근의 것이다. 원래의 묘갈은 봉분이 있는 곳의 석축 아래에 세워져 있다.
묘소 아래 길가에 있는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고, 이조판서 김성근(金盛根)이 쓴 전액(篆額)과 이조참판 김학수(金鶴洙)가 쓴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문화재지정
사적 제305호
문화재명칭
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72번지
관리자(연락처)
문화재청, 경상남도 산청군
남명(南冥) 조식(曺植)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안내문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상당히 가파른 곳에 묘가 조성되었다. 혈(穴)은 항상 평평한 곳에 맺는다. 뒤쪽이 남명선생, 앞쪽은 숙부인 은진송씨 묘이다.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역... 뒤쪽이 남명선생, 앞쪽이 숙부인 은진송씨 묘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전경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상석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갈과 한글로 번역하여 세운 새로운 묘갈명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갈...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갈 번역한 신묘갈명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신묘갈명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갈을 교체하고 옛날 묘갈을 묘 아래쪽에 모아 놓았다.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좌우 망주석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역에는 특이하게 묘역 바깥쪽에 산신석과 제물 준비하는 장소를 별도로 두고 있다. 좌우대칭을 이루기 위해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후경... 앞쪽 탐랑이 조산으로 버티고 있어서 아마 이자리를 소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는 남명선생이 직접 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 산청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유적지 분포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와 산천재 위치
▼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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