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춘군 이현(壽春君 李玹) 수춘군 이현(壽春君 玹, 1431년 ~ 1455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서자이며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세종의 서13남(庶13男)으로 생모는 본관이 청주(淸州)인 혜빈 양씨이다. 1431년 8월 20일(음력 7월 13일)에 태어났다. 정부인으로는 영천군부인 영일 정씨(榮川郡夫人 迎日鄭氏)가 있다. 자녀로는 양자인 수안군(遂安君)이 있고 장녀 이씨가 있다. 1443년 세종이 소헌왕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군 온천에 거둥하게 되었을 때 세종은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수춘군 이현에게 궁을 지키게 하였다. 1437년(세종 19) 12월 8일 수춘군(壽春君)으로 봉해졌으며 1455년(단종 3) 6월 19일(음력 6월 5일) 사망하였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혜빈 양씨(惠嬪 楊氏) 혜빈 양씨(惠嬪 楊氏, 생년미상 ~ 1455년 음력 11월 9일)은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후궁이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의 어머니이며, 손자뻘이 되는 단종의 유모였다. 본관은 청주이고, 시호는 문혜(文惠), 민정(愍貞)이다. 현감 양경과 부인 이씨 슬하의 외동딸로 태어나 처음에는 내명부 예하 궁인으로 들어왔으나 지병으로 병약한 세자를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서 후궁이 되었고 귀인 첩지를 받아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정1품의 빈에 오른 후 혜빈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 자식으로는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두었다. 그녀가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 당시,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 경혜공주와 단종을 혜빈에게 맡기도록 했다. 혜빈은 기뻐하며 자청했고 단종과 경혜공주를 극진히 보살폈다. 특히 직접 기른 단종에게는 더욱 지극한 사랑을 주었으며 단종 또한 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늘 원했다. 왕이 되어서도 단종은 혜빈의 처소에서 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수양이 모사를 염려하여 가로막았다. 지아비인 세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궐을 나가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죽고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산에 있던 혜빈이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되어 단종을 보필하였다. 혜빈이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이 문종의 후궁인 홍 귀인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혜빈을 대신하게 하자 혜빈은 더 이상 단종을 보필 할 수 없었다. 혜빈은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하였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신원(伸冤) 되었다. 혜빈의 유해는 종조부인 병사공 양치가 남몰래 거두어 포천 기당리 세장산에 묻고 평토를 하여 극비에 부쳤다. 이러한 내력은 경혜공주의 수기에서 볼 수 있다. 아들 영풍군도 곧 살해당하였고, 한남군은 금산 1459년 6월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1534년(중종 29년)에 장증손자인 호천군의 대궐 앞 상소로 비로소 왕계로 복원이 되었다. 1570년 장증손자 호천군이 노직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고손자 적이 원종공신이 됨에 추증군이 되었다. 사후 복권되어 문혜(文惠)의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15년에는 정조의 모친 혜빈 홍씨(혜경궁)와 같은 작호를 피하여 새로 민정(慜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신주를 새로 만들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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